캠핑장에서|소로우 베케이션
캠핑장에서|소로우 베케이션
  • 서승범 차장
  • 승인 2014.08.2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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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알프스 밑 산동네 샤모니를 어슬렁거리다가 자전거 빌려주는 가게를 보고 들어갔습니다. 세 시간 타는 데 20유로, 우리 돈 3만원이 조금 안 되는 비용입니다. 배낭과 크로스백, 카메라가 부담스러웠지만 묶고 걸고 메고 탔습니다. 어렵게 온 출장이니 어떻게든 더 멀리 돌아다니며 샤모니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싶었습니다.

자전거도 좋더라고요. 일행과는 자전거 반납 시간에 만나기로 하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습니다. 있는 힘껏 속도를 내서 알프스의 바람을 가르며 달렸습니다. 5분이나 달렸을까? 자전거를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두세 피치 정도 되는 바위에 남녀노소 매달려 등반을 배우거나 즐기고 있었고 그 아래 양지바른 잔디밭에는 구경하는 사람, 낮잠 자는 사람, 간식 먹는 사람 등등이 그냥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 여유로움이 너무 좋아 30분 정도 저도 그 풍경으로 들어가 자전거 옆에 누워 오가거나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다시 자전거를 달려 마을도 보고 숲도 보고 급류처럼 흐르는 빙하수도 보고 돌아오는데 캠핑장이 있더군요. 어찌 그냥 지나겠습니까? 들어가 요금이랑 시설도 살펴보고 캠핑장도 한 바퀴 둘러봤습니다. 샤워시설과 세탁실도 좋았지만 느릿느릿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더 좋았습니다. 볕이 좋아선지 헐렁한 옷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맥주나 와인을 홀짝거리거나 두툼한 책을 보거나 이도저도 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 저를 보다가 미소를 건네기도 하더군요. ‘너도 캠핑하고 싶구나?’ 하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일정상 몽블랑과 에귀디미디를 보며 캠핑하는 호사를 누리진 못했지만 덕분에 버킷리스트가 하나 추가되었습니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을 얻었던 건 빅토리아 여왕 때입니다. 영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빅토리아 시대, 여왕은 고위직 관료에게 ‘셰익스피어 베케이션 Shakespeare Vacation’을 주었습니다. 휴가를 받은 관료들은 한 달 동안 셰익스피어의 작품 5편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해야 했습니다.

저는 일을 당기고 미루어 시간을 모아 ‘소로우 베케이션 Thoreau Vacation’을 떠날 생각입니다. 네, <월든Walden>의 그 소로우입니다. ‘왜 우리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한 가지의 삶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같은 글을 찬찬히 곱씹을 여유는 1년에 한 번이라도 가져야 하니까요. 한 달 정도 샤모니의 캠핑장에서 몽블랑을 보며 소로우를 전작하는 것이 새로운 버킷리스트입니다.

혹, 이런 성격의 휴가를 허하는 회사가 있다면 연락주세요. 바로 인터뷰 들어가겠습니다. 이런 미래지향적이고 바람직한 휴가 문화는 빨리 널리 퍼져야 합니다. 단, 대표와 직원이 동일인인 1인 회사는 안 됩니다. 어쨌거나. 샤모니 몽블랑이 아니라도, 한 달이 아니라도, 전작이 아니라도, 굳이 소로우가 아니라도, 조용한 숲에 들어 삶의 나침반과 이정표를 맞춰 보는 시간은 꼭 필요합니다. 극성수기를 맞아 한몫 잡으려 빈 땅에 파쇄석 깔아 줄 긋고 캠핑장이라고 돈 받는 캠핑장과 캠핑장 일세를 전세로 착각하는 행락객들을 보면서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휴가를 떠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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