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왕이 숨었던 산엔 원시의 숲이 있었네”
“갈왕이 숨었던 산엔 원시의 숲이 있었네”
  • 글·김경선 기자l사진·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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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푸마와 함께하는 KOREA TRAVEL 정선 ① 가리왕산 트레킹

휴양림 매표소~어은골~마항치삼거리~정상~중봉~휴양림 매표소…약 13km 7시간 소요

▲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어은골은 시원한 계류가 끊임없이 흘러 산행 내내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선은 산과 강의 고을이다. 강줄기 따라 높은 산들이 솟아 있는 이 깊은 산골에 들어서면 신세계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든다. 푸른 산줄기가 굽이치는 곳마다 소박한 민가가 있고, 드문드문 보이는 가파른 들에는 허리 굽힌 아낙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이 척박한 땅에 넘치는 것이라야 산뿐이니 자연도 풍경도 꾸밈없는 순수함이 느껴질 수밖에.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입구에 있는 민박집 수정헌에서 산행을 함께할 정선 주민 장순원(40) 씨를 만나 휴양림으로 들어섰다. 매표소에서 입장료(1000원)를 내자 직원이 가리왕산 산행의 주의사항을 간단히 설명했다.

“산행중 임도를 두 번 만나실 겁니다. 가끔 힘들다고 임도를 따르시는 분들이 있는데, 가리왕산 임도는 워낙 길어서 조난당하기 십상입니다. 절대 임도로 가지 마세요.”

매표소를 지나자 계곡을 따라 휴양림 도로가 이어졌다. 완만한 도로를 따르는 길, 가리왕산(加里旺山, 1561m)의 우람한 자태가 드러났다. 가리왕산은 옛날 고대국 맥(貊)의 갈왕(葛王)이 예(濊)의 침입을 피해 숨어들었던 곳이라 하여 갈왕산으로 부르다 일제강점기 이후 가리왕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대동여지도 등 19세기에 발간된 고지도에는 ‘가리산’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돼 있다. 가리산이라는 이름의 연유는 산의 모양이 곡식이나 장작을 단으로 묶은 더미를 뜻하는 ‘가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 우거진 숲 사이로 흐르는 청명한 어은골.
삼복더위에도 시원한 기운이 흐르는 어은골
휴양림 도로를 따른 지 15분이 지났을까. 오른쪽으로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자 산림휴양관 오른쪽으로 산길이 보인다. 어은골 통해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다.

토요일 아침, 어은골은 계류 소리만 가득했다. 워낙 깊은 산골에 있는 산인지라 주말에도 산행객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장순원 씨의 설명이다. 인적이 드물다는 것은 태고의 순수함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계곡은 영롱했고, 숲은 울창했다. 산길도 사람 하나 겨우 지날 만큼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물고기가 숨어서 산다’는 뜻의 어은골에는 6·25전쟁 이전까지 화전민 1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곳곳에 작은 집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졌다. 간간히 자연이 만들어 놓은 징검다리로 물길을 건너길 수차례. 완만한 계곡길을 40여 분 오르자 중봉 자락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이 어은골과 만났다. 물길을 건너 어은골을 계속 따랐다. 지금껏 완만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계곡 합류지점부터 조금씩 고도를 높이며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산길은 점점 완만해졌다. 그리고 드디어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이 펼쳐졌다.

며칠 전부터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차가운 계류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어은골은 흐르는 땀을 금세 식힐 만큼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숲도 어찌나 울창한지 햇빛 한 점 쉽게 파고들지 못할 정도다. 그렇게 산길을 따른 지 1시간20여 분, 취재진 앞에 임도가 나타났다.

해발 1561m의 산은 큰 키만큼이나 수고로움을 요구했다. 600~700m의 산들이 2시간 가량이면 정상을 보여주는 데 반해, 가리왕산은 2시간을 꼬박 걸었는데도 고작 산중턱이다. 정말로 임도의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아까 휴양림 직원이 말대로 절대 임도를 따르면 안 된다.

▲ 정상에서 바라보자 산들이 첩첩이 포개진 장관이 수묵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힘들죠. 급경사길이 계속 이어지거든요. 여기서 충분히 쉬고 올라갑시다.”

몇 년 전 외지에서 정선 땅으로 들어와 가리왕산 인근에 살며 가끔씩 산을 찾는다는 장순원 씨는 느긋했다. 빨리 오르려고 할수록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그는 ‘빨리빨리’에 익숙해져버린 기자에게 숨어 있는 야생화를 일일이 찾아주며 느긋해지기를 권했다. 정상만 급급해하던 마음이 갑작스레 부끄러워졌다.

임도를 지나자 주변의 자연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등산로 주변을 빽빽하게 메운 고로쇠나무와 엄나무, 가래나무…. 다소곳하게 입을 다문 둥굴레꽃, 순백의 방울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은방울꽃, 화사한 신부의 부케 같은 쥐오줌풀, 영롱한 보랏빛이 아름다운 벌깨덩굴, 하얀 두루미가 날개를 활짝 펼친 두루미꽃…. 여린 꽃잎을 수줍게 펼친 야생화들은 자연과 동화되는 사람들에게만 모습을 드러냈다. 무심코 걷기만 한다면 이 야생화의 순수한 자태를 놓치기 십상이리라.

수묵화 같은 정상 조망

▲ 매발톱꽃
야생화를 만끽하며 된비알을 50여 분 올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던 된비알은 마항치삼거리를 앞두고 갑자기 순해져 완만하고 호젓한 숲길로 변했다. 부드러운 육산인 가리왕산은 정상에 가까울수록 오히려 경사가 완만해졌다.

임도를 뒤로 한 지 1시간20여 분만에 가리왕산 주능선 마항치삼거리에 닿았다. 이정표 옆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는 사이 등산객 한 명이 잰걸음으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산행을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산길이 주능선에 닿았지만 시원한 조망은 없었다. 갈왕이 왜 가리왕산에 숨어들었는지 이해가 될 법도 하다. 이렇게 깊고 울창한 산 중에 숨어있다면 그 누가 쉽게 찾을 수 있을까.

▲ 은방울꽃
잠깐의 휴식 후 다시 정상으로 발길을 돌렸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10여 분을 걷자 정상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561m라는 높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완만한 모습이다. 뒤돌아보니 더욱 장관이다. 3시간 동안 꼭꼭 숨겨놓았던 산줄기의 향연이 고사목 너머로 수묵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펑퍼짐한 정상 중앙에는 돌로 쌓은 제단과 정상 표지석이 있고, 그 옆으로 널찍한 헬기장도 보였다. 주변에 나무가 거의 없고 고사목 몇 그루만 있어 사방으로 강원도의 첩첩한 산군이 시원하게 조망됐다. 태백산·계방산·오대산·두타산·청옥산·발왕산 등 명산의 산줄기도 한눈에 들어온다. 휴양림 매표소 앞의 민박집 수정헌을 출발한 지 4시간. 계속된 오르막에 몸은 지쳤지만 정상의 빼어난 조망은 산행의 힘겨움을 잊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다.

▲ 중봉에서 내려서자 널찍한 헬기장이 나타났다.

포근한 어미의 품처럼 완만한 주능선
정상에서 서쪽 중봉 방향으로 내려서자 완만한 내리막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 군락을 지나자 배고픈 멧돼지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산답게 여기저기에 나무뿌리를 파헤친 흔적이 눈에 띄었다.

‘우거진 수풀 어딘가에서 갑자기 멧돼지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슬그머니 들었지만, 넓고 깊은 산은 멧돼지마저 꽁꽁 숨겨 놓았나보다.

▲ 정상과 달리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이 좋지 않은 중봉.
평지처럼 완만한 능선을 50여 분 걸어가자 중봉에 닿았다. 중봉은 정상인 상봉과 다르게 주변 조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중봉에서 내려와 널찍한 헬기장을 오른쪽에 휴양림으로 하산하는 산길이 보였다.

급한 경사길은 하산하는 발목을 수시로 붙잡았다. 꽤 긴 산행으로 지친 취재진에게 천천히 가라는 산의 경고 같았다. 그렇게 걷기를 1시간, 임도를 지나자 내내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일교차가 큰 날씨 때문인지 하늘이 소나기를 퍼부을 기세다. 갑작스러운 경고에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투둑 투둑 투둑!”

소나기를 반기는 숲의 화답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구슬픈 아라리 가락 같기도 하고, 청아한 아이들의 합창소리 같기도 하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방울이 열기를 식혀주니 하산길에서 만난 소나기가 오히려 반갑다. 그렇게 초여름 숲은 젖어가고 우리는 부드러운 갈왕의 품을 천천히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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