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에게 산악인은 일회용 도구일 뿐”
“K2에게 산악인은 일회용 도구일 뿐”
  • 특별취재팀
  • 승인 2014.07.0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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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북벽서 추락사한 김형일·장지명 유족 릴레이 인터뷰②

고 장지명 대원의 아버지 장인동씨는 첫눈에 봐도 큰 병을 앓고 난 사람처럼 수척했다. 3년에 걸쳐 사고로 숨진 아들을 수습하느라 장씨의 가정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원래 건강한 체질이었던 장씨는 당뇨가 오면서 몸무게가 몰라보게 빠졌다고 한다.

또 소송에 매달리느라 생업이었던 분당의 꽃가게를 접었다가 5개월 전부터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장씨의 부인은 정신요양병원에 입원했을 정도로 사고 충격의 후유증이 커서 현재 집에서만 지낸다고 한다. 장씨는 이 소송이 마무리 되면 촐라체 입구에 산악인들이 편히 쉬었다 갈 수 있는 조그만 쉼터와 추모비를 세우고 싶다고 했다.

▲ 장인동씨의 핸드폰 바탕 화면에는 아들 사진이 들어 있다. 장씨는 지금도 아들 생각이 나면 이 사진을 어루만진다고 한다. 사진 양계탁 기자

대법원에 상고를 낸 이유는 뭔가?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말라는 의미다. 충분한 체력과 정보, 시간을 갖고 도전하라는 메시지다. (둘은) 무모하게 죽었다. 사람이 죽어선 도전이 아니다. 일부 아웃도어 업체한테만 이익을 주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이걸 판결로 남겨서 추후라도 젊은 사람들이 어떤 맹목적 추종보다는 자기의 신념을 갖고 도전을 하라는 의미다.”

소송을 하게 된 구체적인 배경이 궁금하다
“장례식을 치르고 한 달 후쯤인 12월에 케이투코리아의 성 차장이라는 사람하고 김종곤(K2 아웃도어 아카데미 교장)씨가 만나자고 해서 갔는데, 김형일 대장의 보상 내용을 알려주었다. 산재보험처리로 합의를 봤다고 했다. 그런데 지명이는 (케이투코리아) 직원이 아니라 보상 내역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이렇게 사고가 났을 때 어떤 대책이 없었느냐 그랬더니 없단다. 그래서 사고가 나서 죽으면 그만이고 다쳐도 그만 아니냐고 했더니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럼 홍보 효과는 얼마나 있냐고 묻자 성 차장이라는 사람이 홍보 효과도 없고 판매 매출 신장도 안 되고 클라이밍센터 자체가 적자라 대책이 없다고 했다. 거기서 내가 느낀 게 여기서 뭘 얼마나 더 구걸을 하겠느냐, 그래서 정영훈 대표를 만나려고 했다. 몇 번이나 만나려고 했는데 얼굴도 못 봤다. 전화를 해도 안 받았다. 나중에는 내용 증명을 보냈는데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 소송을 하게 된 거다. 케이투코리아는 산악인들을 일회용 도구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한번 쓰다가 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해외원정 때 대원들이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어깨를 다쳐도 치료비를 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신의가 없고 믿음이 없으면 대원들이 뭘 믿고 회사를 쫓아다니겠나?”

▲ 경기도 분당의 모 교회 카페에서 만난 장인동씨. 사진에 얼굴 나오는 걸 꺼려해 뒷모습을 찍었다.
케이투코리아에게 어떤 보상을 요구했나?

“(소송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변호사가 산출 방식에 따라 소송한 것뿐이지 그 이전에는 아무 요구한 것도 없었다.”

손해배상 금액은 어느 정도 되나?
“한 5억8천인가 된다(장지명씨의 일실수입 손해 4억2천만원+위자료 1억원에 원고 2명의 위자료 6천만원. 장지명씨의 근로 연수를 60세로 했을 때 월 급여 130만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 지명이가 예전에 두산그룹 다닐 때 연봉 4,500만원을 받았다.”

지금까지 소송비용은 얼마나 들었나?
“한 7천만원 정도 된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5개월 전에 아파트 경비일을 시작했다.”

소송 과정에서 케이투코리아의 태도는 어땠나?
“처음엔 몰랐는데 김형일 대장은 출장으로 원정을 갔다. 케이투는 처음엔 개인취미활동을 후원해줬다고 했는데 나중에 출장이라고 밝혔다. 김종곤씨가 장례를 다 치르고 나서 출장 얘기를 했다. 출장 목적은 항소심에서 보니까 영상제작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홍보영상 제작은 아니고 도전영상 제작 운운하면서 기록보전이라고 했다. 법정에는 케이투가 사건을 맡긴 법무법인 변호사들이 나오고 회사에선 아무도 안 나왔다. 원고증인신청을 해서 김종곤씨가 한 번 왔다 가고, 법무팀장도 한 번 나오고 아무도 안 나왔다. 나중에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정영훈 대표를 꼭 한 번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도 안 나왔다.”

부장판사가 왜 정영훈 대표를 나오라고 했나?
“강제조정을 하려고 그랬다. 부장판사가 케이투코리아 사장이 얼마나 힘 있는 사람인지 모르지만 부장판사도 세다. 그러니까 나오라고 했는데도 안 나왔다.”

장지명씨는 두산그룹을 퇴사하고 원정을 갔나?
“두산그룹을 잘 다니다가 좀 쉬겠다고 해서 뭐가 좀 힘든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승낙했다. 그러면서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 김형일 대장과 정영훈 사장을 만났다. 체력이 좋고 산을 잘 타고 젊은 나이니까 그렇게 인연이 되어 케이투코리아에 임시직으로 들어갔다.”

장지명씨는 케이투코리아에서 어떤 업무를 했나?
“클라이밍센터 쪽에서 일했다. 주말마다 등반하는 사람들을 가이드 했다고 한다. 한 1년하고 그만 두겠다고 그랬다. 너무 시간에 얽매이고 또 일방적인 계약이고 회사 조건이 안 좋다고 했다.(장지명씨는 2010년 9월 케이투코리아의 브랜드 마케팅팀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해 산행가이드 및 문서정리업무를 하다가 2011년 8월 퇴직하고 촐라체 원정에 합류했다.)”

▲ 촐라체 원정 출국 사진. 36시간 안에 정상을 등정하고 귀환하는 프로젝트였다.

해외원정은 어떻게 해서 가게 됐나?

“케이투코리아 창립 40주년 행사로 히말라야 5개봉 원정 계획이 있었다. 제일 먼저 간 스팬틱 골든피크(7027m)는 성공을 했다. 그 다음이 가셔브롬5봉(7147m)인데 거기서부터 지명이가 따라갔다. 그 다음이 자누(7710m) 동벽, 촐라체(6440m)였다. 원래 계획은 초오유(8201m)였는데 자누와 가셔브롬5봉이 실패하자 촉박했던 것이다. 8000m가 넘는 초오유 원정은 억대가 넘는 돈이 들어가고 셰르파와 포터 등의 현지 고용 인원도 늘어나 비용 부담이 컸을 것이다. 대원들도 부상을 당해 이탈하는 등 갈 수 있는 사람이 부족했다. 그래서 촐라체로 갑자기 변경되었다. 촐라체는 원정 비용이 2,500만원밖에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박영석 원정대 실종자 수색작업에 참여했나?
“카투만두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안 풀고 비행기 타고 바로 안나푸르나로 갔다. 실종 지점이 6100m 정도라는데 아무리 전문산악인이라도 고소적응 없이 거기까지 단번에 갔으면 몸에 무리가 갔을 것이다. 1차 수색작업에 투입된 두 사람은 깊이가 200~300m 되는 크레바스를 몇 번씩 오르내렸다. 고소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체력도 떨어지고 극도의 긴장상태였을 것이다. 일주일 수색작업을 마친 뒤 본사에 전화하고 촐라체로 갔다. 그때 지명이는 감기가 나은 상태였고, 형일이는 감기에 걸렸다. 그 상태에서 무리수를 두고 올라간 거다. 영상을 보면 역력하게 나타난다.”

등반 영상을 봤나?
“김형일 대장이 앞서 가다가 5000m쯤 되는 초입에서 지명이를 선등시켰다. 그런데 형일이가 지명이를 쫓아가지 못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명이가 5100m쯤 되는 지점에서 2시간 이상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 추위에 앉지도 못하고 짐도 못 풀고 서서 있었다. 그러니 둘 다 체력이 떨어진 것이다. 5300~5400m 지점에서 발목부상, 탈수증세가 와서 등반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렵다는 무전이 날아왔다. 그럼 거기서 하산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밤이 되니까 그냥 올라갔다. 나중에 보니까 둘이 찾으려고 했던 얼음동굴은 5100m 지점에 있었다. 잘못된 정보로 6000m 지점에서 찾았던 것이다.”

▲ 케이투코리아가 제작한 김형일 대장과 장지명 대원의 추모 포스터.
사고 현지에서 정영훈 대표가 유족들한테 보상 등 수습방안에 대해 따로 이야기한 적이 있나?

“그런 건 전혀 얘기가 없었다. 정 대표는 네팔 현지에서 김형일 대장과 지명이하고 국내 산에 함께 다녔던 시절을 회상하며 둘을 칭찬하는 이야기만 했다. 국내에 와서 장례를 치를 때 처음에는 가족장으로 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지명이가 산을 많이 탄 애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국산악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많은 분들이 조문을 와서 고맙게 생각한다. 화장터에서 케이투코리아 직원이 그냥 이렇게 보내기는 뭣하고 1년 후에 네팔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데 소송이 걸린 탓인지 아무 얘기가 없었다. 해서 촐라체로 가는 임일진씨에게 지명이 유골을 건네주었다.”

만약 케이투코리아에서 자리를 마련하면 나갈 의향은 있나?
“고등법원에서 조정을 하려고 할 때 내가 요구한 게 있다. 돈은 이차적인 문제다. 첫째는 정영훈 대표가 유족들 앞에 와서 사과를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 죽은 것도 죽은 거지만 여태껏 마음고생 시킨 것만으로도 사과를 해야 한다. 물론 정영훈 사장도 마음 고생했겠지만 유족들 같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팔 현지에 김형일과 장지명을 추모할 수 있는 걸 마련해 달라고 했다. 그런 조건이 먼저 성립이 되기 전까지는 다른 걸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다.”

소송이 끝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촐라체 입구에 산악인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조그만 쉼터를 만들고 싶다. 또 추모비도 세우고 싶다. 아파트라도 팔아서 하고 싶은데 지금 매매가 안 된다. 내가 다니는 교회 선교사한테 부지나 물색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한편 본지가 보낸 질의서에 3일 현재 케이투코리아는 아직 공식 답변을 보내지 않고 있다. [특별취재팀 윤태석·박성용·양계탁 기자]

※본지는 케이투코리아의 화려한 이면에 숨은 비정하고 몰인정한 기업문화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향후 케이투코리아의 광고는 게재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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