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 블랙의 액티비티 아웃도어 | 겨울 울릉도 ② 두 번째 이야기
쟈니 블랙의 액티비티 아웃도어 | 겨울 울릉도 ② 두 번째 이야기
  • 글 사진 쟈니 블랙 기자
  • 승인 2014.04.24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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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모험이고 나발이고 저길 어떻게 가요!”

나와 브랜든은 고생고생하며 만든 설동 안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 위로 갑자기 눈덩이가 떨어져 너무 놀라 잠에서 깼다. 서둘러 헤드랜턴의 불을 밝히니 침낭은 물에 젖어있고, 얼음 천장은 코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런! 촬영을 위해 어젯밤 너무 많은 랜턴과 스토브를 켜 놓고 잔 것이 화근이었다. 서서히 녹아내린 얼음 동굴의 천장은 어느새 금방이라도 우리를 덮칠 기세였다.

▲ 부서지는 파도와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울릉도 해안.

나중에 울릉도 주민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울릉도는 전국 제일의 적설량을 보이는 지역이지만 한겨울에도 영하권으로 떨어지는 날은 그리 많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우리가 머물던 당시의 기온은 영하 5도 이하의 추운 날씨였지만, 육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기온이었다.

무너진 설동과 물에 잠긴 해안도로
아무튼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설동 안에 더 이상 누워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잠자고 있는 브랜든을 서둘러 깨웠다. “브랜든~ 브랜든~ cave in~ cave in(무너지고 있어)” 그렇게 소리치며 나는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아직 잠이 덜 깬 브랜든은 그만 눈폭탄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장비가 몽땅 젖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때 오래전에 히말라야 원정을 다녀온 한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 설동 입구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곳에 가게 되면 인간의 끝을 보게 된다.”

육체적인 고통이 한계점에 달하면 결국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고, 무한대의 이기적인 마음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일행에서도 이때부터 조금씩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출발 예정지였던 포항에서부터 시작된 결항으로 묵호항에서 이틀간 뜻하지 않던 해변 캠핑을 하고, 울릉도 도착 후에는 연일 계속되는 폭설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날 호진의 쉘터에서 함께 쪽잠을 자고 다음날 해안도로가 있는 도동항으로 향했다. 해안도로는 울릉도 여객선 터미널이 위치한 도동항에서부터 울릉도 최고 항인 저동항까지 이어지는 도로로 기암절벽과 넘실대는 파도를 동시에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절경 중의 절경이 이어지는 관광 명소다.

▲ 섬을 둘러싸고 있는 해안도로는 울릉도의 관광명소다.

어렵사리 도동항까지 왔지만 또 다른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동항 여객선 터미널 뒤편에 있는 해안도로 입구가 높은 파도로 인해 잠겨버린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막힌 입구를 넘어서 도로로 향했다. 그곳에서 본 경치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부서질 듯 연신 퍼붓는 파도와 해안 동굴 그리고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까지 정말 브랜든이 왜 이 길을 꼭 가야만 한다고 했는지 알 거 같았다.

마을 분들은 이런 날씨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곳곳에서 태평하게 바다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 도착한 해안도로의 중간 지점인 해남등대는 우리 일행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멀리보이는 저동항의 모습과 절벽들 그리고 발아래 넘실대는 파도와 동해의 웅장함이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순간 너 나 할 것 없이 감탄을 내뱉었다.

▲ 힘든 여정이지만 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 울릉도의 좁고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다.

▲ 하늘을 지붕 삼아 자는 브랜드과 필자.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저 멀리 보이는 저동항으로 가는 해안도로 위로 파도가 덮치고 있었다.

“이야, 우리 정말 대단한 모험을 하고 있는데 안 그래?”

“형님, 모험이고 나발이고 저길 어떻게 가요!”

“We can make it! Don't worry. hojin!(우린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호진!)"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길 멈추지 않았고, 해안도로를 향해 나있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막상 이곳까지 오자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실감했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양양에서 서핑장을 운영해 파도의 움직임을 자주 관찰해왔던 나는 파도가 도로를 덮치고 빠지는 때를 기다렸다가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저동항 입구에 도착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도동항의 입구는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넘을 수 있는 높이의 입구였던 반면 이곳 저동항의 해안도로 입구는 높은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있었다.

▲ 근사한 설동을 완성한 필자와 브랜든.

파도는 계속해서 들이치는 상황이고 그 높이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게다가 해는 저물어가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챙겨갔던 아이스툴을 이용해 내가 우선 콘크리트 담장을 넘은 뒤 로프에 배낭을 하나하나 묶어 끌어올렸다. 그렇게 카라비너와 로프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우리는 어렵사리 저동항에 발을 디디게 됐다.

▲ 브랜든이 나무에 로프를 묶고 하강 준비를 하고 있다.

13일 동안 원 없이 돌아다닌 울릉도
녹초가 돼버린 우리는 저동항의 한 모텔에서 짐을 풀고 장비들을 말렸다. 그렇게 이틀 동안 모텔에 머무니 우리는 또 다시 텐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이건 도대체 병명을 뭐라고 붙여줘야 할까. 그 고생을 하고 겨우 이틀을 쉬었을 뿐인데 또 텐트 생각이라니. 호진이는 이곳에서 하루를 더 쉬면서 근처를 돌아보기로 하고 나와 브랜든은 또다시 길을 떠났다.

▲ 움막에서 불을 지피니 아늑하고 따뜻했다.

나와 브랜든은 울릉도 이곳저곳을 다니다 버려진 움막을 발견했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장작과 땔감이 있었고, 내리는 눈을 막아줄 지붕까지 있으니 이곳에서라면 굳이 텐트를 치지 않고도 오늘밤 따뜻한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탁탁 소리를 내며 장작이 타들어가자 움막 안은 금세 따듯한 온기로 가득해졌다. 우리는 저동항에서 구입한 바게트 빵에 대충 자른 양파와 참치 캔, 마요네즈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조촐했지만 내가 이제껏 먹어본 것 중 최고 맛있는 바게트 샌드위치였다.

▲ 비록 작은 샌드위치지만 맛은 꿀맛이다.

▲ 바다를 내려다보며 하루를 보냈다.

▲ 파도가 들이치는 해안도로를 걷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랜든은 한국 사람들은 산행이나 캠핑에 걸맞지 않은 지나친 고기능의 장비들을 가지고 다닌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나 역시 이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불티 자국이 수십 개나 나있는 브랜든의 낡은 우모복은 우리 기준에서는 낡고 초라한 것일 수 있지만, 사실 그동안의 여정을 말해주는 자랑스러운 훈장이다.

이곳에 도착한 뒤 이미 여러 번의 의견충돌로 말다툼을 한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낡은 움막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화해의 악수를 했다. 다음날 드디어 기다리던 희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내일 묵호항으로 돌아가는 여객선이 들어온다는 이야기였다. 울릉도 주민이 해준 말 중 울릉도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우산국과 또 하나 ‘자물도’라는 이름이 있다고 한다. 한번 들어오면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섬이라는 뜻인데 이번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 이름의 뜻을.

처음 우리들이 모였던 포항에서부터 시작된 이번 여행은 장장 12박13일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지만 그 덕에 정말 원 없이 울릉도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어렵게 울릉도를 떠나 묵호항에 도착해서도 눈 속에 파묻힌 우리의 차를 꺼내기 위해 또 다시 3시간이 넘게 삽질을 해야 했지만, 평생토록 기억에 남을 소중한 추억을 한가득 만들고 돌아온 여행이었다.

쟈니 블랙|20여 년 동안 산·들·바다·강 어디가 됐건 아웃도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싸돌아 다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웃도어를 섭렵하는 그날까지’를 모토로 블로그(blog.naver.com/helix136)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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