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성의 방랑수첩 휘뚜루마뚜루 | 설산이 보이는 들판
김홍성의 방랑수첩 휘뚜루마뚜루 | 설산이 보이는 들판
  • 글 사진 김홍성 기자
  • 승인 2014.04.18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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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날을 걷고 또 걸어서 떨쳐낸 불면

석 달 이상 불면에 시달린 나머지 깊은 잠이 그리워서 네팔로 돌아갔던 적이 있다. 네팔은 오래 전부터 드나들었고, 또한 십 년 가까이 눌러 살기도 하면서 고향이 된 땅이다. 다시 갔을 때 우선 설산 기슭의 산길을 걸었다. 날이 새기 무섭게 여장을 꾸리고 이슬이 덜 마른 축축한 흙길을 걷다가 길가의 주막집에 들러 늦은 아침을 먹고는 다시 걸었다. 해지기 전에 마음에 드는 또 다른 주막집을 찾아서 주린 배를 채우고 여장을 풀었다. 그렇게 날마다 걷는 동안 냉혹한 비난이나 비웃음과 함께 비통하게 엉켜들던 수많은 상념도 서서히 가라앉더니 어느 날 밤부터는 저절로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잠을 자게 되었다.
 

한뎃잠이나 다를 바 없는 산촌 주막의 헛간 같은 방이라서 잠자리가 편하지는 않았어도 제법 달콤한 꿈도 꾸면서 잤다. 그러나 귀국을 위해 산길을 벗어난 후로는 다시 잠이 달아났다. 번잡스런 카트만두에 도착하자 불면은 다시 찾아왔다. 하루 이틀은 견딜 수 있었으나 사흘 밤을 그렇게 못 자고 나니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신경은 바지직 바지직 타들어가는 듯 예민해져 있었다.

스무 날을 걸었지만 더 걸어야 했다. 걷고 또 걸어서 고유의 생체 리듬을 제대로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룸비니였다. 룸비니 국제사원 구역의 한국사원 대성석가사였다. 절을 나서면 들길이 사방팔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 걷고 또 걷다가 돌아와 푹 쉴 수 있는 그곳은 나에게 익숙한 곳이기도 했다. 건립 초기에 1년쯤 살았던 인연으로 2층의 법당 밑에 있는 방 한 칸을 얻었다.

첫날은 역시 한숨도 못 잤다. 시체처럼 누운 채 날 밝기를 기다리는 중에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동 트기 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크고 작고 멀고 가까운 수많은 절에서 빛살처럼 어둠을 뚫고 건너오는 종소리는 내 마음에 공명을 일으켜 죽솥에 눌어붙은 누룽지 같은 근심을 조금씩 조끔씩 떨어내고 있었다. 그때 목탁 소리가 나고 주지 스님은 염불을 하면서 도량석을 시작했다. 예전보다 훨씬 청아해진 주지 스님의 염불 소리…. 도량석이 끝나면 예불이 시작된다.

예불이 끝나도 사위는 캄캄하다. 예불은 4시에 시작하여 5시 전에 끝나기 때문에 아침 공양 시간까지는 1시간이 남아 있다. 이 1시간 동안 첫 산책을 나선다. 길에 나서면 별들이 가득한 하늘, 때로는 안개가 자욱하여 길마저 희미한데, 어디선가 배고픈 새들이 울기 시작하고, 새들의 울음소리는 중국 절에서 쿵쿵 울리는 큰북 소리에 묻힌다.

내 발길은 우선 서쪽으로 향한다. 어둑한 들이 있고, 지평선이 있고, 기우는 보름달이 있고, 들 가운데 보리수가 있는 서쪽. 이슬에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논두렁길을 걸어 보리수에 다녀오는 중에 일출이 시작된다. 내가 살았던 10여 년 전에 기초 공사를 시작하여 이제 겨우 형태를 갖춘 대성석가사 대웅전 너머로 붉은 햇살이 뻗친다. 나의 아침 산책은 그 대웅전의 난간에서 마무리 된다. 운 좋은 날은 설산 다울라기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운이 더 좋은 날은 그 설산을 넘어온 황새들이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대성석가사는 네팔 정부가 주도하는 룸비니개발위원회에서 개발한 국제사원구역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둘레를 한 바퀴 빙 도는데 너 댓 시간 족히 걸린다. 그리고 그 둘레로 난 길 밖은 광막한 들판이다. 북쪽 들판은 그 뒤에 히말라야 연봉이 늘어서 있으며 나머지 세 방향은 지평선까지 경작지가 이어진다. 경작지 가운데는 여러 마을들이 듬성듬성 낮게 엎드려 있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소로들이 경작지 사이로 거미줄처럼 퍼져 있다. 나는 관광객들로 번잡스러울 때가 많은 룸비니 국제사원 구역 내부에 조성된 산책로보다는 구역 밖 사방팔방으로 끝없이 뻗어 나간 옛길과 그 주변의 풍광이 좋았다. 특히 인도와 접경을 이룬 지평선을 향해 가는 길가의 경작지와 마을과 장터와 선술집들이 이루는 풍광이 좋았다. 나는 그런 풍광 속을 날마다 걸었다.

절밥을 먹으면서 예불을 안 하면 눈치가 보이는 법이라 조석 예불을 빠짐없이 드리면서 걸었다. 예불 마친 새벽은 물론, 아침 공양 마친 후에 또 걷다가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는 입은 옷을 빨아서 널었다. 먼지와 땀에 전 옷가지를 욕실의 고무 함지에 뭉쳐 넣고 물을 틀어 적신 다음에 세제를 뿌리고 한참 발로 밟고 나서 몇 차례 헹궈서 널면 해가 채 기울기 전에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뜨거운 햇살에 빨래가 마르는 동안 낮잠도 자고, 임자 없는 헌 책도 들춰보다가 태양의 열기가 좀 누그러지면 저녁 공양 시간까지 다시 걸었다. 저녁을 먹고는 곧 예불이 시작되므로 멀리 걸을 수 없어서 절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열흘이 지났는지 보름이 지났는지 모르도록 터덜터덜, 느릿느릿, 날마다 걷고 난 어느 새벽에는 그토록 그리던 깊은 잠을 이루며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잠을 방해하던 무엇이 안개가 흩어지듯 저절로 흩어진 것이었다. 그 후 2년이 지난 지금은 그 전처럼 심한 불면으로 고통 받는 일은 없다. 그러나 깊은 잠을 못 자고 얕고 짧은 잠을 자는 것은 여전하여 다시 행장을 꾸려 길에 나서는 꿈을 꾸곤 한다.

‘행진하는 대열 속에서 보조를 맞추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북소리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던,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에서.

김홍성 | 히말라야 산촌을 좋아하여 네팔에 가서 오래 살다가 돌아온 시인. 시집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여행기 <꽃향기 두엄냄새 서로 섞인들> <우리들의 소풍>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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