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과 금강이 만난 ‘멋진 신세계’
정지용과 금강이 만난 ‘멋진 신세계’
  • 글 사진·진우석 출판팀장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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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길 | ⑦ 옥천 ‘향수 30리’길

▲ 둔주봉 전망대에서 본 금강과 한반도 지형. 한반도는 좌우가 바뀐 모습이다.

구읍~장계리 예술거리 산책, 둔주봉과 금강 걷기

최근 ‘향수 30리’길이 옥천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그것은 정지용의 생가가 있는 구읍에서 장계리 ‘멋진 신세계’를 잇는 30리 시문학 거리를 말한다. ‘멋진 신세계’는 정지용의 시 19편을 주제로 오래되고 방치되어 사람들에게 잊혀진 장계관광지를 새롭게 꾸미고 붙인 이름이다. ‘향수 30리’길은 예술과 관광이 오묘하게 조화되어 신기하고 볼거리가 많다. 여기에 둔주봉(384m)을 넣으면 완벽한 옥천 걷기가 완성된다.


옥천은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청정고을이다. 금강의 맑은 물이 옥토를 이루고 산자수려한 자연환경과 유구한 문화전통을 간직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옥천을 대표하는 인물은 시인 정지용이고, 자연은 금강이다. 정지용과 금강이 만나 ‘향수 30리’길이 만들어졌다.

▲ 정지용 문학관의 밀랍 인형. 사진 촬영 단골 장소다.
실개천이 흐르는 구읍의 매력
우리나라 최초의 모더니스트 시인 정지용(1902~1950)은 한때 잊혀진 존재였다. 6·25전쟁 때 납북된 것이 빌미가 되어 좌파 시인으로 분류됐기 때문. 하지만 1988년 해금되어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1996년 그의 생가가 복원됐고, 2005년에는 정지용 문학관이 건립되면서 그의 발자취와 생애, 문학을 한 자리에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문학관 벽에 붙은 재미있는 그림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소절 읊조릴 수 있는 ‘향수’는 노래로 만들어져 더욱 유명해졌다. 정지용은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부른 노래로 인해 국민시인의 자리를 더욱 굳건히 다지게 됐고, 잊혀 가던 고향의 정경은 우리 마음속에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정지용의 생가가 있는 곳은 옥천 구읍이다. 옥천역이 생기기 전에는 이곳이 옥천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옥천역이 생기면서 역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다 보니 지금은 쇠락해 ‘옛 구자(舊)’를 써 구읍이라 불린다. 구읍은 비록 경제적으로 밀려나 있지만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고 생가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그의 문학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최근에는 생가 주변 상가들이 정지용의 시를 활용한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간판들로 단장해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 소박한 초가집으로 복원한 정지용 생가.

정지용 생가로 가는 길은 ‘향수’ 시구처럼 ‘실개천이 휘돌아’ 나간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 복원된 생가가 나온다. 방이 세 칸에 부엌이 한 칸이 소박한 초가집이다. 이 집은 정지용의 시에서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으로 나타난다. 안방 안에는 동시 ‘호수’가 걸려 있다. 정지용의 많은 시 중에서도 짧고 아름다운 시어로 가득한 것이 동시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 정지용 생가 앞에는 ‘향수’의 시구처럼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흐른다.

생가를 나오면 바로 옆에 정지용 문학관이 있다. 1층 건물인 문학관은 전시실과 문학교실로 운영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지용 밀랍 인형이 반긴다. 전시실은 아이들의 놀이터다. 아이들은 제법 향수 구절을 흥얼거린다. 전시실은 주로 영상 홍보물이 중심인데, 특히 정지용 육필 산문과 옛 시집이 마음에 든다. 사진으로 보던 시집 ‘백록담’의 빛바랜 그림 표지를 보니 감동이 밀려온다.

문학관을 구경했으면 구읍 거리를 돌아다닐 차례. 구읍 우편취급소, 시가 있는 상회, 꿀꿀 정육점, 앵도 미용실…, 아기자기한 상가들의 간판에는 군데군데 정지용의 적혀 있다. 거기서 시를 찾아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구읍 볼거리는 상가들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건물과 고풍스러운 한옥들도 제법 남아 있다. 그중 춘추민속관은 옥천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고택이다. 1760년에 세워진 고택에서 한옥 체험, 전통 혼례, 한옥 학교 등을 운영한다.

“음악회 할 때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주인장 정태희 씨는 내심 춘추 민속관의 한옥마실 음악회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쉬운 듯했다. 수백 년 묵은 커다란 회화나무 아래는 커다란 평상이 놓여 있다. 여기 앉아 지긋이 바라보는 마당과 집 분위기가 근사하다.

▲ 구읍의 상가 간판들은 정지용의 시를 넣은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정지용의 시와 설치 미술의 만남
▲ 춘추민속관은 고택이면서 열린 공간이 특징이다. 마당에 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구읍 구경을 마치면 장계리의 ‘멋진 신세계’를 찾아갈 차례. ‘멋진 신세계’는 정지용의 시 세계를 공간적으로 해석한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말한다. 정지용의 시를 모티브로 이완, 이정인, 홍지윤 등 작가 100여 명이 참여해 2년 동안 장계관광지를 새롭게 꾸몄다. 구읍에서 구37번 국도를 따라 30리쯤 이어지는데, 차가 뜸한 도로지만 걷기는 좀 무리다. 그 아쉬움은 나중에 둔주봉에서 풀 수 있다.

‘멋진 신세계’ 입구에 서자 ‘모단광장’이 반긴다. ‘멋진 신세계’는 크게 시문학 광장인 ‘모단광장’과 놀이 광장인 ‘프란스광장’으로 나뉜다. 두 광장은 강변을 낀 고즈넉한 산책로로 연결되고, 그 길을 따라 20여 작품이 펼쳐져있다.

▲ 춘추민속관은 고택이면서 열린 공간이 특징이다. 마당에 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방문자가 처음 만나는 ‘모단광장’은 원고지 한 장을 건물과 광장으로 연출한 독특한 작품이다. 모던가게 유리벽에는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정지용의 ‘유리창’이 적혀 있다. 정지용이 아들을 잃고 썼던 슬픈 작품이다.

모단광장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금강을 조망할 수 있는 ‘창’, ‘유리병’, ‘오월소식’ 등의 작품들을 만난다. 모두 정지용의 시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로 시와 미술의 만남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호젓한 강변길을 따라 나타나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는 맛이 쏠쏠하게 좋다. 길 곳곳에 놓인 벤치에도 정지용의 시구가 적혀 있다. 쉬면서도 작품 감상은 계속된다. ‘프란스광장’ 일대는 관람차, 청룡열차, 우주 전투기 등의 놀이기구들이 있는데, 그 간판들 역시 예술적이다.

금강이 빚은 한반도 지형

▲ 역대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을 모은 시비들.
‘멋진 신세계’를 둘러보며 살짝 맛봤던 금강 풍경은 안남면 둔주봉에서 유감없이 만끽할 수 있다. 금강은 대부분 구간에서 아직까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특히 영동을 지나 옥천 땅에 아름다운 정취를 펼쳐놓았다. 최근 인기가 좋은 둔주봉은 비단처럼 흐르는 금강이 빚은 한반도 지형이 일품이고, 호젓한 강변길을 따라 걸을 수 있어 더욱 좋다. 

둔주봉이 알려진 것은 사진 동호인이 올린 한반도 지형 사진이 화제가 되면서부터다. 이에 발맞춰 안남면사무소에서도 등산로를 내고 정자를 세웠다. 산길은 안남면 연주리 안남초등학교를 들머리로 전망대와 정상을 거친 후에 피실로 내려와 금강을 따라 걷는다. 안남초등학교 앞에서 길을 나서면, 옥수수·고추 등이 자라는 편안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는 점촌고개에서 은은한 솔향기 맡으며 20분쯤 가면 시야가 넓게 열리면서 전망대가 나타난다. 정자에 오르니 사진에서 보았던 한반도 지형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비단결처럼 고운 금강은 S자를 그리면서 한반도 지형인 갈마골을 부드럽게 품고 있다. 갈마골에는 두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맞으며 조망을 즐기니 신선이 부럽지 않다.

▲ 정지용의 시 ‘오월소식’을 형상화한 조형물.
다시 길을 나서면 소나무가 참나무로 바뀌면서 둔주봉의 깊은 품으로 들어간다. 갈림길이 나오는 안부에서 가파른 비탈을 100m쯤 오르면 둔주봉 정상. 산호랑나비 한 쌍이 화려한 구애 비행을 펼치고 있다. 가끔 산제비나비도 등장해 허공을 한 바퀴 돌고 간다. 이번 산행 내내 다양한 나비들을 만났다. 그만큼 둔주봉 일대가 청정한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상 조망은 서쪽으로 열리는데, 구절양장 흘러가는 금강 줄기가 마치 동강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정상에서 피실로 내려서면 전망대에서 보았던 금강을 만난다. 길은 강변에 바투 붙은 산비탈로 이어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강물을 보면서 걷는 맛이 기막히다. 강으로 내려가고 싶지만, 나무들이 가리고 길이 험해 쉽지 않다. 좀 걷다보니 아름드리 아그배나무들이 펼쳐진 그윽한 숲을 만난다. 이런 강변을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호젓한 강변 숲길을 천천히 걷다 심심하면 보기 좋게 물수제비를 뜬다. 여기서는 시간도 강물처럼 느릿느릿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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