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암 자우산방에서 만난 눈발
해남 두륜산 일지암 경내에 들어서자 봄을 시샘하는 때늦은 눈발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미리 약속을 하고 간 여정이라 스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일지암에 머물면서 우리의 차 문화를 계승하는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직접 차를 재배하고 덖어 팔기도 했다. 그 당시 경제 호황에 힘입어 소득이 늘고 여유가 생기자 다도문화 붐이 일면서 초의선사가 만년을 보낸 일지암은 다도의 산실로 유명세를 치렀다. 나는 차보다는 초의선사의 정신을 잇고자 했던 그 스님이 궁금해 아는 사람을 통해 만나기를 청한 것이다.
“오디오에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나는 무안해져서 화제를 바꿨지만 한번 꽂힌 호기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스님도 이런 내 심정을 알아차린 듯 이내 오디오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속가의 형수님이 장만해준 겁니다. 집안의 상속을 모두 포기한 시동생에게 준 선물이었죠.”
그는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 오디오 마니아라면 군침을 흘리는 명품 앰프와 스피커가 좁은 방안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스피커 상판에는 음반들도 쌓여 있었다. 그는 나중에 알고 보니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스님과 대화는 다도나 차보다는 음악과 오디오로 일관했다.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는 울림이 좋아 최적의 음악 감상 공간으로 꼽는다. 나는 음반을 이것저것 골라 볼륨을 올리고 느긋하게 음악을 들었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중 잔잔한 신의 음성 같은 3악장,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오중주곡 등을 CD플레이어에 걸었다.
“오늘처럼 눈 오는 날에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를 들으면 기가 막힙니다.”
현악기와 보컬 재생에 탁월한 탄노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노래는 마치 가수가 눈앞에서 공연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건 몰라도 스님의 저 오디오 시스템과 공간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대청마루 밖에는 눈발이 날리고 찻잔은 식어갔지만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구스타프 말러 ‘대지의 노래’는 두 명의 남녀 성악과 관현악이 들어간 교향곡이다. 중국의 이백, 맹호연, 왕유의 시에 곡을 붙인 총 6악장으로 구성되었다. 대지의 애수를 위로하는 술 노래, 가을에 고독한 자, 청춘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봄에 취한 자, 고별 등 각 악장의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듯 내용과 선율이 염세적이면서도 탐미적이다. 특히 쓸쓸한 인생의 뒤안길을 노래한 마지막 6악장 고별이 유명하다. 메조소프라노 자네트 베이커와 테너 제임스 킹을 기용한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지휘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관현악단은 무려 31분이 넘는 고별 악장 연주에서 짙은 여운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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