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 | 그리그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뮤직 | 그리그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 글 박성용 기자
  • 승인 2014.02.27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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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봉 산장에서 보낸 하룻밤

진고개 휴게소에서 만난 노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막걸리부터 시켰다. 평일에도 행락객들로 북적거리던 휴게소는 겨울이 깊어가자 인적이 거의 끊어졌다. 나와 후배는 해가 기우는 휴게소 밖을 내다보며 출발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지만, 술 한 모금을 들이켠 노인은 긴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노인은 초조해하는 우리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자네들도 한 잔씩 하게나.”

해지기 전에 노인봉 산장까지 가려면 지금 일어서야 하는데, 느릿하면서도 단호한 노인의 어투가 발길을 붙잡았다. 그는 산장과 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노인봉 산장에 정착하게 된 사연과 그간 겪었던 돼먹지 않은 산꾼들의 행태를 꼬집었다. 눈이 많이 쌓이면 산악스키로 산장과 주문진 바닷가를 오르내리면서 술을 마신다는 그의 산중생활은 풍류처럼 다가왔다. 노인의 고약한(?) 성미를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또 그의 말을 들으면서 바깥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진솔한 면모를 발견하기도 했다.

“강원도의 산에서 자작자작한 눈을 만나면 무조건 하산해야 돼. 함박눈보다 이런 눈은 며칠씩 내리기 때문에 위험하거든.”
“저희 먼저 올라갈 테니 뒤 따라 오십시오.”
“산장 문은 열려 있으니까 먼저 가서 쉬게나.”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발을 뿌릴 듯 꾸물꾸물해지고 저녁 어스름이 시작됐다. 오대산을 크게 한 바퀴 돌기 위해 꾸린 대형배낭에는 야영장비가 들어 있지만, 날이 어두워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 헤드랜턴을 켜고 도착한 산장은 적막강산. 산장 옆에는 노인의 살림집인 움막이 낮게 엎드려 있었다. 부랴부랴 배낭을 내려놓고 물을 뜨러 샘터에 내려갔다. 해가 떨어진 산골은 기온이 뚝 떨어져 산장까지 오는 동안 코펠에 그새 살얼음이 끼었다. 또 멧돼지가 방금 헤집고 간 흔적을 보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어두운 산길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귀신이 아니라 멧돼지 아니던가. 밤이 되면서 다행히 하늘은 개었다. 저녁을 해먹고 산장 마당에서 야경과 팝콘 같은 별들을 감상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노인봉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중무장을 하고 나섰는데도 정상에 오르니까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붉은 여명 속에서 꿈틀거리는 첩첩산줄기를 보자 추위는 사라지고 가슴이 뭉클하게 데워졌다. 멀리 공제선에 걸린 설악산의 하얀 능선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산장에 내려와서 아침을 준비할 때 노인이 올라왔다. 그는 움막으로 가더니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직접 채취한 여러 약초로 끓인 차였다. 노인과 맺었던 이때 인연은 그가 하산해서 서울 중계동에 차린 주점 노인봉 주막으로 한동안 이어졌다.

노르웨이 출신의 그리그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세 곡 남겼다. 이중 3번 C단조 op.45는 깨끗하고 투명한 북유럽의 자연과 서정을 담은 작품. 열정적인 1·3악장 사이에 낀 2악장 로만차는 오로라가 넘실대는 북구의 겨울 하늘을 연상케 한다. 코끝은 차갑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노인봉 일출에서도 그런 감흥을 느꼈다. 뭉크의 그림 ‘기차 연기’를 재킷에 담은 이 음반은 표지부터 인상적이다. 한 음 한 음이 또렷한 별빛 같은 마리아 주앙 피르스의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난 뒤 아스라이 가슴 한쪽을 시리게 하는 오귀스탱 뒤메이의 바이올린 음색은 찰떡궁합이다. 소나타 세 곡이 모두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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