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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DOOR LIFE |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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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용 기자
  • 승인 2014.01.20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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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
설악산 눈밭의 비박

설악산 십이선녀탕 입구 남교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배낭에 매단 온도계 수은주는 곤두박질을 쳐서 영하 10도를 가리켰다. 그해 겨울, 설악산에 많은 눈이 내렸다. 추위가 일찍 찾아와 빙벽 시즌도 빨리 돌아왔다. 설악산의 빙폭마다 산꾼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에 우리는 심설 계곡산행이나 하려고 남교리로 방향을 틀었다. 꽁꽁 언 계곡을 따라 러셀 작업과 크고 작은 빙폭들을 등반하며 상류까지 올라가는 산행을 말한다.

그때는 인공빙장이 드물어서 빙벽등반을 하려면 설악산이나 강촌 구곡폭포 등 자연빙장을 찾아가야 했다. 때문에 첫 한파가 지나면 성질 급한 산꾼들은 남들보다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앞을 다퉜다. 빙폭도 황태처럼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야 빙질이 좋아지는데, 첫 얼음에 성급하게 아이스바일을 찍어대면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눈이 종아리까지 쌓인 남교리 주차장에는 불빛 한 점 없었다. 대신 발자국 하나 없는 순백의 설원이 펼쳐졌다. 목화솜을 튼 것 같은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내딛은 우리의 들뜬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잠자리 걱정 때문이었다. 다들 ‘설마 여기서 야영하랴’는 심정으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자발머리없는 후배 하나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추위에 언 얼굴을 회장에게 들이밀며 곱사등이 아양을 떨었다.

“혀엉, 심란하쥬? 민박 하나 잡아 따끈한 방구들에서 몸 좀 지지다가 아침 일찍 등반하쥬.”
“안 돼. 오늘 여기서 야영한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가. 영하 15도가 넘어야 민박한다는 불문율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다들 군소리 없이 나란히 서서 발로 눈을 꾹꾹 다졌다. 멋쩍어 하는 후배를 보며 고참들은 킥킥거렸다.

“너는 왜 나서 가지고 본전도 못 건지냐.”
“짜식이 회장 체면도 있는데 대놓고 그런 말하면 옳타쿠나 하겠냐.”
“이놈아, 눈이나 꽉꽉 밟아라.”

이렇게 눈밭에 텐트 두 동을 치고 나서 술자리가 이어졌다. 버너 열기와 체온 때문에 좁은 텐트 안은 아열대로 변했다. 차가운 소주를 가득 부은 코펠 하나로 돌리는 일명 ‘알파인스타일’ 주법으로 더워진 몸을 식혔다.

그날 밤, 나는 텐트에서 나와 비박을 했다. 한겨울이라도 텐트 안은 답답했다.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들도 추방을 당했다. 풍찬노숙에 나선 서넛은 침낭에서 상반신만 꺼내놓고 이를 딱딱 부딪쳐가며 마지막 남은 술을 비웠다. 눈만 내놓고 바라보는 밤하늘에는 세상의 모든 별들이 설악산으로 놀러온 것만 같았다. 지난겨울에 가출했다가 돌아온 별들까지 모여 눈밭에 누워 꼼지락거리는 우리를 신기한 듯 내려다보았다. 이날 밤 눈밭의 비박은 환상일까 궁상일까.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1번은 ‘겨울날의 환상’이라는 표제가 붙었다. 러시아 작곡가답게 겨울 풍경을 매력적인 선율로 표현했다. 1악장 ‘겨울날의 환상’ 2악장 ‘황량한 땅, 안개의 땅’이라는 부제도 달려 있다. 상쾌하고 활기로 넘치면서도 우수 어린 1악장은 겨울 여행의 분위기를, 아다지오 칸타빌레로 흐르는 2악장은 애절하고 감미로운 겨울의 몽환을 잘 그려내고 있다. 유명한 <비창교향곡>에 가려졌지만 차이코프스키의 감성을 대표하는 음악이다. 이런 묘사음악은 카라얀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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