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요리사 음식잡설 | 간
태양의 요리사 음식잡설 | 간
  • 글 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3.11.2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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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피맛 뒤에 찾아오는 구수한 풍미

서울의 노포(老鋪)라고 할 오래된 식당은 사실 이 도시의 역사에 비해 참 적은 편이다. 식민지, 사변, 독재시대, 민주화, 경제발전을 거쳐 메트로 시티가 된 지금까지 워낙 격변을 거쳤기 때문일 듯하다. 몇 십 년 전의 동네 풍경이 그대로인 유럽이나 도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래도 오랫동안 맛을 지켜오고 있는 집들이 더러 있기는 하다. 하동관이며 용금옥 같은 탕 전문집들이 그러하다.

▲ 간이 곁들여나오는 잼배옥의 수육.

다른 요리도 아니고 노포 식당은 거의 탕인 것은 이유가 있다. 서울의 고유 음식이랄 것이 바로 탕이기 때문이다. 양반이든 상민이든 계급 차이 없이 탕국밥을 즐겼다. 서울엔 무교탕반이란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이른바 장국밥이다. 간장으로 간을 맞춰 국밥을 차리는 이 장국밥은 이제 거의 보기 힘들다. 대신 누구나 즐기던 설렁탕은 살아남았다.

그중 하나가 잼배옥이다. 종근당 이종근 회장이 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일화가 있는 집이기도 하다. 1933년 서울역 뒤쪽의 잠바위골에서 시작했던 이 노포는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알고 보면 조금 싱겁다. 잠바위골-잠배-잼배가 되었고 끝에 식당이나 가게를 뜻하는 옥(屋)을 붙여 오늘의 상호가 되었다. 옥이란 일본어로 ‘야’라고 부르는, 전형적인 가게 이름의 어미다. 그러니 잼배옥이란 이름은 일제 때 이미 붙었을 것이다.

잼배옥은 설렁탕이 전문이다. 요즘 유행인 깔끔하고 우윳내 나는 뽀얀 국물이 아니라 구릿한 향이 나고 지방층이 두터운 옛날식이다. 오늘 내가 하려는 얘기는 설렁탕이 아니다. 이 집 수육, 그중에서도 간을 말하고 싶다. 수육에 간을 섞어 내주는 집은 아주 드물다. 간은 국물을 내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탕집에서 쓰지 않는다. 대개는 날것으로 고깃집에서 다룬다. 그런데 잼배옥에선 삶은 간을 곁들여주기 때문에 이 글이 시작되었다.

잼배옥 수육이야, 뭐 다른 전통 있는 일급 식당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야겠다. 그런데 나는 이 집의 간 때문에 부러 수육을 시킨다. 보들보들하고 촉촉하게 아주 잘 삶아서 물이 좋을 때 내주기 때문이다. 간은 피가 상당수인 장기다. 그래서 삶으면 촉촉하다가도 이내 마르면서 딱딱해진다. 순댓집의 돼지 간을 생각하면 된다.

나는 오랫동안 간이란 익히면 ‘딱딱한 것’이란 선입견이 있었다. 순댓집 때문이다. 그러다가 잼배옥의 수육 속에서 간을 집어먹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맛은 간인데, 혀에 닿는 질감이 너무 부드러워서 혹시나 이것이 만하니 하는 다른 장기가 아닌가 물어봤던 것이다. 만하란 비장의 고어로 지라를 말한다. 이 글과는 관련이 없으나 만화 <식객>에 나오는 몇 가지 소의 부위를 더 적어본다. 걸랑, 고거리, 고들개, 곤자소니, 구녕살, 꾸리, 다대, 달기살, 대접살, 도래목정, 둥덩이, 떡심, 만하바탕, 만화, 멱미레, 발채, 새창, 서대, 서푼목정, 설낏, 설밑, 수구레, 홀떼기, 이보구니….

▲ 푸아그라

이 집 수육에서 간을 집어서 입에 넣으면 천천히 씹힌다. 섬유질이 약간 있고 이내 구수하게 녹아내린다. 간의 강렬한 피맛이랄까, 헤모글로빈의 진하고 쇳내 나는 맛이 툭 던지고 가면 이내 섭섭하지 않게 구수한 맛이 이어진다. 감칠맛도 뛰어나서 이걸 먹고 다른 부위를 먹으려면 술로 입을 헹궈내야 한다. 간이란 이런 맛이구나, 하는 집요한 줄기가 짚이는 것이다.

간이라면 또 서양 요리가 늘 한몫한다. 오리 간, 즉 푸아그라 때문이다. 푸아그라는 직역하면 ‘살진 간’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푸아, 그라라고 띄어써야 의미가 잘 통한다. 그런데 이 것이 꼭 거위 간을 뜻하지는 않는다. 동물의 간이면 무엇이든 푸아그라가 될 수 있다. 기름지고 살진 맛이 있으면 그렇게 볼 수 있다.

푸아그라는 거위 간으로 알려져 있으나 대개는 오리 간이다. 거위보다 오리가 사육 수율(투입되는 사료 양 대비 고기와 내장의 생산 비율)이 좋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선 푸아그라가 비윤리적이니 뭐니 하는 건 일단 제쳐둔다. 간의 맛을 따지는 글이기 때문이다. 푸아그라는 프랑스에서 많이 생산하지만 원래는 러시아에서 더 유명했다. 차르 시절, 프랑스식으로 먹고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풍토 때문이다.

푸아그라는 ‘스트라스부르의 맛’이란 의미로 알려졌다. 스트라스부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알려진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주도다. 알자스는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무대인 동네이기도 하다. 스트라스부르가 이 푸아그라 요리가 흔하다. 시내에 가면 ‘전통요리’라고 파는 식당이 많은데, 푸아그라가 꼭 들어 있다. 대개는 찬요리다. 푸아그라를 익혀서 틀에 넣어 굳힌 후 이 지역에서 나는 와인 젤리나 소스를 곁들여 낸다. 아주 진하고 약간 비릿한 동물의 원초적 맛이 난다. 잼배옥 수육 속 간의 풍미와 닿아 있는 것이다.

서양이 푸아그라만 먹는 건 아니다. 동물의 간은 다 요리한다. 내가 자주 하는 요리는 닭, 소, 돼지의 간이다. 그냥 구워서 먹기도 하도 삶아서 곱게 내린 후 빵에 발라서 판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간은 특정한 기호식품이 되어버렸다. 아주 맛있고, 영양도 풍부한, 그러면서 값도 싼 이 재료가 외면 받고 있다. 간을 슬쩍 구워서 촉촉하게 만든 후 겨자를 발라 와인에 곁들이면 정말 최고인데, 입맛만 다시고 있다.

박찬일 | 소설을 쓰다가 이탈리아에 가서 요리학교 ICIF, 로마 소믈리에 코스와 SlowFood 로마지부 와인과정을 공부했다. 시칠리아에서 요리사로 일하다 한국에 돌아와 이탈리아 레스토랑 ‘뚜또베네’ ‘트라토리아 논나’ 등을 성공리에 론칭시켰다. 지은 책으로 <박찬일의 와인 컬렉션>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 등이 있다. 최근 서울 이태원에 이탈리아 전문식당 ‘인스턴트펑크’를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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