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요리사 음식잡설 | 돼지 부속요리
태양의 요리사 음식잡설 | 돼지 부속요리
  • 글 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3.10.0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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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자시고 할 것 없는 궁기의 날들

▲ 서양요리의 뿌리인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부산물 요리를 아주 즐긴다.

날씨가 선선해지니 고기의 계절(?)이다. 원래 더운 날에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를 두고 말들이 분분한데, 유력한 설은 돼지고기가 쉬이 상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고기 잡고 먹는 풍습을 충분히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농번기인 여름에 한가하게 돼지를 잡을 형편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고기는 먹어도 되었다는 말인가. 이건 너무도 ‘당연’하니까 언급을 안 했을 가능성이 크다. 소 같은 역축(力畜)을 누가 함부로 여름에 잡겠는가. 으레 소고기는 빼고, 개고기나 닭고기, 돼지고기를 두고 여름에 먹네 마네 했을 것이다.

잔치가 있어도 소를 잡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곧바로 먹기도 힘든 부위인데다가 값도 아주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잔치에는 돼지를 잡았다. 그런데 대개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 그저 마을잔치에서 잡는다면 당연히 겨울이었다. 농한기이며, 보존도 오래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 간혹 아버지가 시골 잔치에 가셨다가 생 돼지고기를 둘둘 신문지에 말아서 가져오신 기억이 난다. 요즘처럼 비닐이 흔하던 때가 아니라 신문지로 싸고 시멘트 포대 같은 것으로 다시 한 번 갈무리했지만, 고기에서 나오는 육즙이 배어나와 신문지가 고기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 유럽을 여행한다면 내장 요리를 한번 즐겨보시는 건 어떨까 싶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후에야 고기 섭취
이건 사실인지,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신문 활자가 고기의 비계(흰 부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것 같기도 하다. 육즙에 축축해진 신문의 활자가 비계에 전사(轉寫)된 것이었을까. 하여튼 그런 고기가 오면 어머니는 푹 삶았고, 묵은 김치와 함께 먹었다. 계절의 기억은 없는데, 묵은 김치를 싸서 먹은 걸 보면 역시 겨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가 시골에서 돼지고기를 서울까지 싸들고 오기란 난망한 일이었을 테니까.

아, 이 얘기를 하니 추억 한 토막이 더 있다. 군에서 갓 제대를 하고 지금은 돌아가신 외숙모에게 간 적이 있었다. 외숙모는 집에 가져다주라고 투박한 돼지뼈와 거기에 붙은 살점(아마도 뒷다리 사태살)을 사주었다. 그걸 들고 집으로 간 게 아니라 대학 선배들이 뭔 장시(長詩)를 쓴다고 합숙하던 학교 연구실에 간 것이었다. 지금은 턱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때는 학생들이 방학 중에 학생 연구실을 점거(?)하고 쓰는 일을 학교에서 말리지 못했다. 거기서 그 고기를 굽고 다 먹어버렸다가 나중에 어머니에게 무진 혼이 났다.

“야야, 그래 외숙모가 집에 가가라고 싸준 돼지고기를 몽땅 친구들이랑 먹어버리는 게 무슨 법도고?” 그때 그 고기는 아주 질겼다. 왜 아니겠는가. 구이용이 아니라 보쌈이나 해야 먹을 고기였으니까. 그 고기를 함께 먹은 사람들 중에는 지금 이 잡지의 편집장도 있다.

우리는 돼지를 알뜰하게 먹는 민족이다. 왜 아닐까. 버리고 자시고 할 게 없이 다 먹어치우기에도 늘 모자랐다. 자이니치[在日]들이 일본에서 그들이 먹지 않는 쇠고기 부산물을 주워다가 구워 팔며 연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이니치의 극적인 삶, 김준평이라는 극도의 가부장을 통해 전후 재일동포의 삶을 조망한 걸작 <피와 뼈>(양석일의 소설로 최양일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기타노 다케시가 주인공 김준평 역을 맡았다)을 보면, 김준평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돼지를 잡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에서 이 장면은 아주 극적이었을 것이다. 돼지 내장을 가지고 순대를 만드는 장면 등 돼지의 부속을 갈무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고, 비로소 메이지 유신이 되고 전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나마 소 돼지의 부산물은 먹지 않았고, 그래서 전설의 ‘호루몬야키’(버렸다는 뜻의 일본어에 구이라는 말이 붙은 것, 또는 맨홀 하수구에 버렸다는 뜻도 있다고 한다. 즉 내장구이를 말한다)가 탄생할 수 있었다.

▲ 이탈리아는 동네 마트에도 족발과 소 내장이 진열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부산물 요리를 즐기는 유럽 음식문화
오랫동안 우리의 표준적인 서양은 미국이었다. 서양요리는 곧 미국음식이었다. 프랑스에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소 스테이크가 서양요리의 상징처럼 한국에서 알려진 것도 미국의 영향 때문이다. 미국=서양식=스테이크라는 등식이 있었고,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서 부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 미국식 요리법이 서양식의 표준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서양요리의 뿌리인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부산물 요리를 아주 즐긴다. 우리가 ‘스지’라는 일본어로 많이 부르는 심줄, 혈관, 아기보, 창자, 간, 허파, 염통, 신장 등을 아주 즐긴다.

우리나라는 취급 문제로 동네 소매시장에선 순대 말고는 이런 부위를 거의 팔지 않는데, 그쪽 나라에선 동네 마트에도 족발과 소 내장이 진열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만큼 그런 요리가 발달해 있고, 맛도 좋다. 우리는 소 내장은 주로 구워 먹고, 돼지 내장은 주로 순대의 부속으로 먹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내가 있던 이탈리아만 해도 온갖 요리법을 동원했다. 찜, 구이, 냉채, 탕, 스프….

그러니까 마치 가축 내장은 우리만 잘 먹는 걸로 생각하면 오해다. 우리나라 고급 양식당에서 소 내장 요리를 만나기란 하늘에 별따기겠으나 서양에선 흔히 만날 수 있다. 소곱창으로 만든 파스타나 내장찜 같은 걸 웬만한 식당에선 다 만날 수 있다. 독일에 가서 도저히 해독 불가능한 메뉴판을 물어보면, 영어 잘하는 그들이 곧바로 대답한다.

“피트(발), 텅(혀), 브레인(뇌)….” 서양인들이 스테이크만 즐기는 것 같지만, 여러 부위를 먹는데 특히 소고기만 먹는 것도 아니다. 이 역시 미국식 풍습이다. 미국은 아무래도 소의 나라다. 그러나 유럽은 소를 기르기에 좋은 나라가 별로 아니다. 그래서 돼지고기가 더 흔하다. 유럽,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여행 가서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를 한 번 먹어보려면 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소나 돼지의 내장 요리를 드시려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어찌 됐든 소 스테이크는 미국에 가서 드시고, 유럽을 여행한다면 내장 요리를 한번 즐겨보시는 건 어떨까 싶다. 아, 황소 눈알이나 뇌 요리 같은 건 요새는 쉽게 볼 수 없다. 광우병 이후의 새로운 풍습이다.

박찬일 | 소설을 쓰다가 이탈리아에 가서 요리학교 ICIF, 로마 소믈리에 코스와 SlowFood 로마지부 와인과정을 공부했다. 시칠리아에서 요리사로 일하다 한국에 돌아와 이탈리아 레스토랑 ‘뚜또베네’ ‘트라토리아 논나’ 등을 성공리에 론칭시켰다. 지은 책으로 <박찬일의 와인 컬렉션>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 등이 있다. 최근 서울 이태원에 이탈리아 전문식당 ‘인스턴트펑크’를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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