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일러닝|2013년 몽골 고비사막 레이스 ②
트레일러닝|2013년 몽골 고비사막 레이스 ②
  • 글 사진 김정호 런액스런 회원
  • 승인 2013.09.25 16: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록보다 값진 꿈과 도전정신

▲ 후반 레이스부터는 페이스 조절과 컨디션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울트라 마라톤을 한 번이라도 뛰어본 사람들에게는 꼭 도전해보고 싶은 인생 최대의 모험이 있다. 바로 사막 레이스 그랜드슬램(사하라·고비·아타카마·남극대륙)달성이다. 이는 만만치 않은 시간과 비용, 노력이 필요하므로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최근 이 목표에 도전하는 20대 청년들이 부쩍 늘었다. 작년에는 대학생 3명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놀라운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2회에 걸쳐 글랜드슬램을 위해 도전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꿈과 희망을 포기하고, 비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자극이 될 수 있는 그의 도전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

▲ 오르막 뒤에 이어지는 내리막에선 무릎통증이 더 심해진다.

컨디션 관리가 완주의 관건
간밤에 비가 쏟아졌다. 텐트에 물이 새고 일교차가 심해 잠을 설쳤다. 36.5km를 달려야 하는 셋째 날부터, 몸이 점점 쑤시기 시작했다. 경사가 심한 알타이 산맥을 지나쳐야 되서 걱정이 됐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앞주머니에 근육이완제와 아스피린을 준비했다. 출발 5분전, 갑자기 배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순간 고민이 됐다.

화장실에 들러야 하나? 늦게 출발하고 싶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얼른 볼일을 해결하고 부지런히 뒤따라가는데 이젠 길을 알려주는 분홍색 깃발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10분 전만 해도 깃발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당황스러웠다. 고민하다가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갔다. 주변에 만발한 분홍색 꽃을 보고 내가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자갈길을 달리는 와중에도 날씨는 수시로 바뀐다.

체크포인트를 얼마 안 남겨두고 만난 급경사에선 다수 참가자들이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나 역시 피로도가 극심했지만, 미리 준비한 아스피린과 근육이완제로 버티며 언덕을 올랐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지는 내리막에선 언제 힘들었냐는 듯이 쌩쌩하게 움직였다. 어느새 저 멀리 캠프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무사히 버텨준 다리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레이스의 반이 지난 넷째 날부터는 다리에 무리가 확실히 느껴졌다. 왼쪽 아킬레스건과 오른쪽 무릎에서 걸음을 뗄 떼마다 통증이 찾아왔다. 전날 근육이완제를 먹어두고 출발 30분 전엔 진통제로 상태를 진정시켰다. 아침부터 주변에 안개가 자욱해 제법 쌀쌀하기까지 했지만, 자갈길을 따라 달리다 보니 금세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40.8km 길이의 코스를 절반쯤 지나고 나니 마을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길 양옆에 서서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지쳐있었지만, 응원소리에 좀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북소리를 따라 들어선 도착점에선 먼저 온 지섭 형님이 어깨를 다독이며 반겨줬다.

▲ 직접 준비한 의상으로 장난을 치는 일본인 참가자.

▲ 변덕스러운 날씨도 고비사막레이스의 중요한 변수다.

다섯째 날, 저체온증과의 싸움
가장 긴장되고 힘들었던 다섯째 날이었다. 이날은 75km를 달려야 하는 롱데이였다. 평소의 두 배나 되는 길이라서 늦으면 이틀에 걸쳐 완주하기도 하는 코스였다.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주최 측에선 우비 대신 사용할 검은색 비닐을 지급해 주었다. 아킬레스건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비까지 내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발걸음을 뗄 떼마다 통증과 스트레스가 밀려와 진통제 두 알을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에서 한 꼬마가 멀리서 “짜이오! (힘내라) 짜이오!”하고 목이 터지라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기특해 가던 발걸음을 돌리고 남은 초콜릿 바를 꺼내어 양손에 가득 쥐여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해운 형님은 자기가 쓰던 모자를 주고 왔다고 했다. 영특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가족 같은 끈끈함을 자랑했던 한국 팀 단체 사진.

체크포인트 3을 지나자 더 가파른 경사가 이어졌다. 발목높이까지 올라오는 풀과 빗물이 고인 바닥은 질척거렸다. 3000m가 넘는 곳이라 그런지 바람도 차가웠다. 곡절 끝에 오르막이 끝났지만, 내리막도 문제였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고 우박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리 통증이 심해져서 걷고 있으니까, 체온이 내려가면서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쳤다. 순간 깜짝 놀라 확인해 보니 아까부터 내 뒤를 따라오던 러시아 선수였다. 이럴수록 걷지 말고 계속 뛰어야 한다며 연신 “keep running”을 외치고는 나를 지나쳤다. 그 말에 정신이 들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지치고 힘들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한 5km쯤 달렸을까 싶은데, 저 멀리서 선수들이 짐을 내려놓고 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진행요원이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주최 측에서 레이스를 중지시킨 것이었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져 눈까지 내리는 상황이었다. 10km가 남았지만 아쉬움은 뒤로 한 채 베이스캠프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 진통제를 먹어가며 레이스를 계속하지만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값진 추억으로 남은 고비사막 레이스
드디어 마지막 날. 14km의 비교적 짧은 거리에 가방도 가볍고 마음의 부담은 적었지만 이젠 진통제도 별 효과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지쳐있었다. 그래도 출발 신호가 울리니 모두가 치고 나간다. 물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운 몸을 끌고 따라 뛰었다. 3~4km쯤 달리고 나니 약 효과가 나타나면서 다리의 통증도 사라졌다. 덩달아 기분까지 좋아지면서 페이스를 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내내 사이람 호수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화창한 하늘까지 호수의 아름다움에 빛을 더 했다.

▲ 필자의 최종 기록은 35시간 완주에 전체 순위 17위였다.

결승점에 가까워질수록 고비사막레이스를 위해 준비한 나날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닌 조선소, 훈련을 위해 달렸던 출퇴근길, 대회 참가를 반대했던 지인들과 결정과 포기의 순간에서 갈등했던 일들까지, 지나고 보니 모두 다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내 최종 기록은 35시간 완주, 전체 순위 17위였다. 예상보다 좋은 기록도 나를 기쁘게 했지만, 동료들과의 우정과 고비사막에서 얻은 값진 경험들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