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요리사 음식잡설 | 가지
태양의 요리사 음식잡설 | 가지
  • 글 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3.09.0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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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요리학교에서 깨달은 오묘한 맛

▲ 한국의 어지간한 고급 중식당에서는 어향가지라고 하여, 소고기 소스의 가지요리를 판다.

가지를 날로 먹는 사람은 못 봤다. 날것 가지에는 쓰고 비린 맛을 유발하는 성분이 들어 있다. 한때 가지는 그다지 영양 가치가 없는 식물로 비하됐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가지는 그저 마지못해 반찬이나 해먹는 채소였다. 그러던 것이 미국 언론에 슈퍼 푸드로 소개되면서 가지의 운명이 달라졌다. 보라색이 특별하다는 ‘컬러 푸드’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개량된 품종을 주로 쓴다. 그래서 모양이 대개 비슷비슷하다. 길쭉한 자루 모양이다.

가지의 영어명은 Eggplant다. 계란? 가지가 계란과 무슨 상관이람. 혹시 비릿한 가지 맛이 날계란 맛을 닮은 걸까. 그 의문은 이태리에 가서 풀렸다. 이태리 가지가 하나같이 동그란 계란처럼 생겼던 것이다. 게다가 어두운 보라색, 검정색에 가까운 우리 가지와 달리 다양한 색깔을 가졌다. 연보랏빛, 투명한 보랏빛, 보라색이 섞인 흰색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지 요리가 아주 성행한다.

유럽에서도 처음엔 식품 대접 못 받아
나는 가지 요리라면 아주 이를 박박 갈 정도였다. 먹을 게 풍족하지 않던 시절이라 뭐든 씹어 삼키던 소년이었던 나도 가지에는 고개를 저었다. 들에서 뛰놀다가 무와 열무, 칡, 산딸기, 고구마, 날감자 등 별걸 다 먹었는데 가지는 입도 안댔다. 한번 먹었다가 ‘쎄에’한 맛이 괴로웠다. 뭐랄까, 마치 고무신 밑창에서 나는 냄새 같은 게 났던 것이다. 맛은 슬쩍 달았지만 아려서 씹을 수가 없었다.

가지는 으레 삶아서 먹는 것도 기분이 안 좋았다. 삶으면 흐물흐물해진다. 입에 넣으면 아이 생각에는 마치 코를 한 움큼 머금은 것 같았다. 껍질은 더 기분이 나빠서 치아에 닿는 느낌이 미끌거렸다. 가지 밭에서는 비릿한, 누이의 소녀 시절 옷 냄새가 났다. 가지는 못 먹을 식재료였다.

그러다가 이태리에서 가지를 먹어보기 시작했다. 시모네라고, 아주 젊고 기술 좋은 요리학교 선생이 있었다. 마침 수업이 ‘오븐에 구운 치즈 가지요리’였다. 그가 커다란 슬라이스 나이프로, 그것도 왼손으로 시원시원하게 써는 장면이 너무도 인상 깊었다. 깊고 진한 눈매의 그가 가지를 썰면서 흘끔흘끔, 한국인 학생들을 보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가 썬 가지는 통통하고 두툼했다. 작은 럭비공만 했다. 그렇게 자른 가지를 너른 플랫톱(철판으로 된 다목적 구이기)에서 소금을 뿌려 구웠다. 그리고는 오븐에서 치즈와 함께 익혔다. 가지는 고기처럼 쫄깃했고, 치즈는 살살 녹았다. 누구나 먹어보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요리였다. 이태리 사람들은 가지를 사랑한다.

원래 이 요상한 식물은 중앙아메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전해졌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유럽에서든 한국에서든 처음에는 식품 대접을 못 받았다. 관상용의 요상한 식물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먹기 시작했는데, 그건 토마토의 운명과 비슷했다. ‘악마의 씨앗’이라고까지 불렸던 토마토가 민중의 음식으로 사랑받으면서 제 몫을 찾았듯이.

동양 삼국은 가지 요리를 다 한다. 그런데 한국이 유독 가지 요리가 약하다. 옛 문헌에는 우리도 많았다. 가지밥도 있었다(지금도 만들어 먹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일본은 확실히 튀김을 좋아해서인지 가지튀김이 맛있다. 구이도 있다. 도쿄의 이자카야에서 맛있는 가지구이를 먹었다. 그냥 가지가 전부인 요리였다. 닭을 굽던 숯불에 가지를 구웠다. 겉은 타서 허물어지고 속은 뜨겁게 김을 뿜어 올렸다.

▲ 오븐에서 치즈와 함께 익히면 가지는 고기처럼 쫄깃했고 치즈는 살살 녹았다.
가지를 사랑하는 이태리 사람들
가지는 수분이 많다. 그 뜨거운 기운이 질고도 달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값이 자그마치 1천5백엔, 우리 돈으로 2만원 정도이니까 한국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것 같다. 가지 하나에 2만원이라니. 그래도 술이 술술 넘어갔다.

가지를 튀겨도 맛있다. 덴푸라의 묘미는 반죽을 가볍게 입혀서 그 재료의 위엄(?)과 본질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가지는 그런 요리에 최적이다. 집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가지를 길쭉길쭉하게 썰어 한 입 크기로 토막을 낸 후 시판용 튀김가루와 계란물을 입혀서 튀기는 것이다. 바삭하고 진한 가지의 맛이 살아난다. 맥주를 한 잔 곁들이면!

중국요리도 가지가 유명하다. 한국의 어지간한 고급 중식당에서는 어향가지라고 하여, 소고기 소스의 가지요리를 판다. 맛있다. 내가 잘 가는 마포의 중국요리집인 산동만두(02-711-3958)에서는 달콤하게 여러 채소를 섞어 소스에 볶아준다. 이것도 중국술에 곁들이면 최고다.

이태리 가지 요리 중에 유명한 게 있다. 멜란자네 알라 파르미지아나(melanzane alla parmiggiana)라는 것이다. 이름은 거창한데, 그냥 파르마식의 가지요리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슬픈 사연이 있다. 이름은 파르마식인데 파르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파르마는 부자 도시다. 그리고 파르마 치즈(보통 파르메산이라고 부르는)를 만든다.

그런데 이 요리는 남부의 가난한 곳에서 탄생했다. 마치 파르마처럼 치즈를 뿌려 가지를 굽고,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때 지방에서 서울식당, 서울여관이 많았던 것과 비슷한 정서다. 이 요리는 가지를 길게 썰어서 소금을 살살 뿌려 절여두는데서 시작한다. 수분을 빼기 위함이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바르고 굽는다. 그걸 오븐 팬에 켜켜로 쌓고 중간 중간 치즈를 뿌려 오븐에 구우면 끝이다. 아주 간단하지만 맛은 정말 최고다. 내가 지금 일하는 ‘인스턴트 펑크’에서 인기 있는 메뉴이기도 하다.


박찬일 | 소설을 쓰다가 이탈리아에 가서 요리학교 ICIF, 로마 소믈리에 코스와 SlowFood 로마지부 와인과정을 공부했다. 시칠리아에서 요리사로 일하다 한국에 돌아와 이탈리아 레스토랑 ‘뚜또베네’ ‘트라토리아 논나’ 등을 성공리에 론칭시켰다. 지은 책으로 <박찬일의 와인 컬렉션>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 등이 있다. 최근 서울 이태원에 이탈리아 전문식당 ‘인스턴트펑크’를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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