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요리사 음식잡설 | 반반
태양의 요리사 음식잡설 | 반반
  • 글 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3.08.01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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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넘었으면 슬쩍 가서 외치시라

▲ 장충동 평양면옥에서 인기 있는 반반. 만두 반 제육 반이다.

국정원 선거개입 수사 검사가 중간발표인가 뭔가를 하면서 이랬다고 한다.
“프라이드냐 양념이냐 정하는 것만 남았다.”
수사가 다 끝나서 기소 단계에 들어섰다는 걸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인생 최대의 고민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라면집에서 떡라면이냐 계란라면이냐 선택해야 하는 수많은 괴로움들, 만두가게에서 김치만두냐 고기만두냐 놓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번민을 해야 했던가. 안철수냐 문재인이냐 보다 몇 배는 어려운 선택의 앞에서 우리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데 프라이드냐, 양념이냐.
결국 이런 고민을 덜어줄 대안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들이 잘 아는 ‘반반’이 바로 그것이다. 반반은 순간의 판단에서 미구에 닥쳐올 후회를 피해갈 비겁한 선택일 수도 있다. ‘안전빵’이라는 것이다. 안철수와 문재인에게 반씩 표를 나눠줄 수는 없지만 음식의 세계는 그게 가능하다.

고민을 무력화하는 짬짜면·우짜면
물론 반반이라고 해서 시너지랄까, 100% 플러스 알파가 생기는가가 문제이기는 하다. 때로는 반반이 곧 절반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중 최고는 아마도 짜장과 짬뽕이 아닌가 한다. 어떤 눈치 빠른 주방장이 그 음식을 내놨는지는 몰라도 결국 인기가 시들해지고 말았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정말 곤란한 선택의 기로에서 모든 고민을 무력화해버리는 짬짜면!

그러나 이 요리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우선 두 가지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첫째는 만족감에는 일정한 양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여럿이 음식을 나눠 이것저것 먹기는 먹었는데 만족감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짜장면이라는 일정한 정량을 끝까지 먹었을 때 비로소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지막 소스를 박박 젓가락으로 밀어 넣고 단무지나 춘장 찍은 양파 한 쪽을 씹어야 먹은 것 같은 포만감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그러니 반 그릇의 짜장으로야 어찌 짜장을 먹었다고 할 수 있을까. 짬뽕 역시 면과 고명을 다 건져 먹고 통쾌하게 국물을 들이켜야 만족감이 든다. 국물도 절반이고, 그나마 짜장을 먹느라 국물이 다 식어버린다. 이래저래 먹은 것도 안 먹은 것도 아닌 상황에 놓인다.

둘째는 반반의 조리 과정의 문제다. 반씩 담으려면 요리를 두 번 해야 한다. 대개 그러기는 쉽지 않으니 적어도 짬뽕을 매번 달달 볶아서 할 수는 없다. 미리 볶아둔 고명에 국물이나 부어서 나가야 한다. 그러면 결국 맛있는 짬뽕은 포기해야 한다.

이런 전차로 짬짜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짬짜면은 아니지만 우짜면이란 게 있다. 통영지방에 가면 판다. 그냥 국물 있는 우동에 짜장 소스를 적당히 부은 것이다. 이걸 맛있다고 여기기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다.

우동 맛의 순하고 여린 국물에 짜장이 확 부어져 있으니 이도저도 아닌 요리 같다. 그래도 별식으로 하나씩 사먹기는 하는 모양이고, 향토요리급으로 대우받기도 한다. 어찌 됐든 다른 지방에는 없는 요리이니까. 하지만 나는 추천하지 않는다. 한 달포쯤 살러간 게 아니라면, 통영 특유의 맛있는 요리들을 맛보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그런 요리를 맛보느라 낭비하다니!

"그런데 프라이드냐, 양념이냐. 결국 이런 고민을 덜어줄 대안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들이 잘 아는 '반반'이 바로 그것이다. 반반은 순간의 판단에서 미구에 닥쳐올 후회를 피해갈 비겁한 선택일 수도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애먹이는 주문
이태리 식당에서 일할 때 양고기 반, 소고기 반이라는 스테이크가 있었다. 그런데 이 고기가 서로 물성이 좀 다르다. 양고기 부위는 어깨살 쪽이라 익히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반면 소고기는 등심이라 기름이 많은 편이어서 금세 익었다. 동시에 굽기 시작하면 소고기가 굳어버렸다. 그러니 하나를 먼저 굽다가 나중에 소고기를 그릴에 얹어야 하는데, 툭하면 이걸 까먹는 게 문제였다. 접시에 담아내라는 주방장의 주문을 받고 고기를 담으려면 아뿔싸! 그때서야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그런 탓인지 그 메뉴는 참 애정이 안 가는 요리였다. 디저트도 모둠이 있다. 아이스크림 반에 케이크 반인데 요것도 아차하면 문제를 일으킨다. 케이크는 상온에 두고 쓰므로 상관없는데, 아이스크림은 미리 퍼놓으면 다 녹게 마련이었다. 하여튼 반반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애를 먹인다.

반반이라고 해서 다 문제 있거나 결함(?)이 있는 건 아니다. 장어구이는 반반도 썩 괜찮다. 대개는 그냥 장어를 굽다가 한쪽은 소금만 뿌리고, 한쪽은 양념을 발라 굽기 때문에 미리 해둔다거나 번거로움이 적다. 장어는 단연 소금구이가 ‘갑’이라는 미식가도 많지만, 양념구이의 오묘한 맛, 그러니까 불에 지져진 양념과 달큼한 맛이 어우러지는 것도 썩 괜찮지 않을지.

중국 사천 쪽의 요리 가운데 훠궈가 있다. 샤부샤부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 양고기 꼬치집에서도 많이 판다. 이걸 중국에서 먹는데 태극 모양의 탕기에 붉은 라탕과 하얀 백탕이 나뉘어져 있었다. 라탕은 통쾌한 맛이 있고, 백탕은 진하고 구수하다. 백탕을 먹다가 지루하면 라탕을 먹고, 또 반대의 경우로 해도 된다. 참 개성 없는 조합 같기도 하면서 막상 먹어보면 이게 궁합이 아주 좋다. 반반이라고 해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우니 냉면집 줄이 장사진이다. 선주후면이라고, 냉면 전에 안주를 시켜 먹는 풍습이 있다. 유명 냉면집마다 각기 그 구색이 달라 재미있다.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은 단연 제육이 최고다. 장충동의 평양면옥은 만두가 좋다. 남대문 부원집은 빈대떡이고 저동 평래옥은 빈대떡과 닭무침이다. 그런데 평양면옥에서 인기 있는 건 반반이다. 만두 반 제육 반이다. 반반! 하고 외치면 알아서 아주머니가 척척 내준다. 이 재미, 호탕한 주문, 오랜 어른들의 주문법을 우리도 계승(?)한다는 은밀한 연대감 같은 게 있는 메뉴다. 당신이 한 사십 넘었으면 슬쩍 가서 외치시라. 반반!


박찬일 | 소설을 쓰다가 이탈리아에 가서 요리학교 ICIF, 로마 소믈리에 코스와 SlowFood 로마지부 와인과정을 공부했다. 시칠리아에서 요리사로 일하다 한국에 돌아와 이탈리아 레스토랑 ‘뚜또베네’ ‘트라토리아 논나’ 등을 성공리에 론칭시켰다. 지은 책으로 <박찬일의 와인 컬렉션>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 등이 있다. 최근 서울 이태원에 이탈리아 전문식당 ‘인스턴트펑크’를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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