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요리사 음식잡설ㅣ부산의 맛
태양의 요리사 음식잡설ㅣ부산의 맛
  • 글 사진 박찬일 기자
  • 승인 2013.02.27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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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무라! 무글꺼 천지빼까리다”

▲ 부산 국제시장 잡채골목에 늘어선 좌판들.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종주하는 기차를 타면 하루 종일 걸린다. 시칠리아를 제외하고 내륙으로만 해도 북쪽에서 남쪽 끝까지 1500km가 넘기 때문이다. 한국은 얼마나 될까.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약 400km지만, 신의주나 저 함경도 땅의 끝에서 달린다면 너끈히 그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싶다. 반도의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길기 때문이다.

부산까지 KTX를 타고 달리니, 그 거리가 더 짧아진 것 같다. 잠깐 졸았는데 종착역이다. 부산역은 해안을 타고 연결되는 구시가의 한 축선에 있다. 냅다 남포동으로 달린다. 이젠 다 죽었다는 중앙동이 그나마 높은 빌딩들로 건재를 과시한다. 남포동은 부산역에서 금방이다. 말린 대구가 눈에 띈다. 북빙양에 가까운 추운 바다에서 살다가 가덕도의 고향으로 어김없이 회유하는 대구떼다. 다 같은 대구 같은데 반도의 이쪽저쪽에서 나는 게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서쪽에도 대구가 있다. 이 녀석들은 원래 회유해야 하는 대구 무리에서 갈라져 나간 토박이들이다. 좁은 바다에서 아옹다옹 사느라 체구가 작다. 작으니 맛도 덜린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요샌 동해안쪽에서 대구가 적어지고 남쪽이 풍어다. 가덕도나 진해만의 대구다. 이쪽의 대구는 몸빛이 얼룩이 다르다. 어쨌든 자갈치시장에는 대구가 지천이다. 나는 이맘때라면 당연히 말린 대구를 고른다. 생대구야 서울에서도 흔한데, 바닷바람을 맞고 삐들삐들, 꾸덕꾸덕 마른 대구는 당연히 해안을 찾아야 한다. 시장의 건어물가게는 바로 천장 위에다 대구를 넌다. 시장 앞이 바로 바다이니, 차가운 해풍이 불어서 녹진하고 꿉꿉하게 대구의 살을 말려준다. 수분이 마른 대구는 맛이 심화되고 집중력이 좋아진다. 대구 살은 원래 국물을 내기 좋지만, 살 자체는 좀 보드라워서 조이는 맛이 적은데 말리면 얘기가 다르다. 이렇게 마른 대구를 사서 다진 마늘과 화사한 고춧가루를 뿌려 찜통에 찌면 넋 빠지게 맛있는 별미다.

…대구 위에다 얇게 썬 오이를 얹은 다음, 불에서 내려 케이퍼를 첨가했다. 대구 요리에다 나는 새우꼬리를 뿌렸다.…(중략) 서서히 익어가는 대구를 손가락으로 잡아 뜯었다…

귄터 그라스의 걸작 <넙치>에 나오는 독일식 대구 요리를 설명하는 시다. 케이퍼 같은 서양 양념으로 요리를 해봐도 좋겠다. 물론 대구의 정소인 이리를 넉넉히 넣고 진한 대구탕이 더 당기는 계절이기는 하다.

▲ 뼈와 사태로 간결하게 맛을 낸 부산 돼지국밥은 정구지(부추) 무침을 얹어 먹는다.
▲ 조선방직의 줄임말을 붙인 조방낙지는 맵고 달달하며 부드러운 낚지볶음이다.

입으로 먹는 한국 근현대사
대구는 계절 별미이나 국밥은 부산의 사철 명물이다. 우리나라의 각 지방 음식은 탕이 발달했다. 간단하면서도 후끈한 음식이 나눠 먹기도, 주린 배를 채우기도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장터를 중심으로 소나 돼지를 기본으로 하는 국밥이 발달했다. 부산의 돼지국밥도 이런 장터의 음식이 확장된 게 분명하다. 돼지 한 마리를 잡아야 하는데, 장터처럼 많은 이들이 모이는 곳이라야 상시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빤한 토박이들이나 오가는 시골 작은 식당에서 어디 가능한 규모였겠는가.

부산의 돼지국밥은 경남의 몇몇 소도시와 함께 서면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한다. 지금도 서면에 가면 국밥골목이 있다. 경상도는 국밥 문화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대구의 소고기국밥(따로국밥)과 이 지역의 돼지국밥이 도드라지는 국밥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돼지국밥은 다른 지역의 순대국밥과는 뿌리가 달라진다. 순대국밥이 머릿고기와 뼈, 순대와 내장의 조화를 꾀하는 ‘잡탕’이라면 돼지국밥은 뼈와 사태로 간결하게 맛을 결정낸다. 잡내 없이 부드러운 살코기가 일품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필요한데, 이쪽 사내들 말을 옮기면 이렇다.

“마 정구지 쎄리 처붓고 대지국밥 한 그릇 무면 속이 든든….”
정구지란 부추를 이름이다. 너무 진하지 않은 국물에 푸들푸들한 고깃점이 씹히고, 정구지 무침이 넉넉하게 올라간 돼지국밥! 감사합니다, 아지매.

부산의 맛도 맛이지만 독특한 정취도 빠뜨릴 수 없다. 국제시장 먹자골목 중에는 하루 중 오후에만 시작하는 비상설 식당가가 있다. 아무 것도 없던 텅 빈 골목에 한 떼의 아지매들이 우우 몰려와 장사를 하고, 마감을 하면 어느새 골목을 쫙 갈라지는 홍해 바다라고나 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감쪽같음에 놀라게 된다. 바로 잡채를 파는 골목이다. 특이하게도 매운 양념을 끼얹어 먹는 이 별미는, 맛보다도 내게는 골목이 채워졌다 비워졌다 하는 6·25 피란민 같은 기동성이 더 신기할 따름이다. 그것이 단속 때문인지 그저 원래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단한 요리 봇짐을 들고 움직여야 하는 아지매들의 고난이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이다.

부산은 식민시대를 떼고 얘기하기 어렵다. 침략의 전초기지이자 물산이 들고나는 주요 지대였다. 여기에 식민 산업도 싹을 틔웠다. 전설의 조선방직도 그렇게 부산 범일동 일대에 문을 열어 근대적 직물을 짰다. 물론 직공은 조선 사람들이었다. 그 조선방직 앞 동네에 전후에 낙지를 파는 선술집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조방낙지는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방직의 줄임말 조방. 조방낙지는 맵고 달달하며 부드러운 낚지볶음이다. 값도 놀랍게 싸고 낙지의 질도 좋다. 검은색 프라이팬에 낙지를 담아내는 게 특별하다. 더운 김을 내며 낙지를 볶아 땀을 뻘뻘 흘리며 소주를 마시는 부산 사내들이 모습에서 항구의 억센 기질이 느껴진다.

돼지국밥과 낙지에 더워진 몸은 부산식 냉면인 밀면으로 식히면 정석이겠다. 메밀 대신 밀가루와 전분으로 쫄깃하게 만든 냉면이다. 시원한 국물을 들이켜노라니 이 우울한 겨울의 막막한 감정이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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