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져 흐르는 게 어디 강뿐이랴
구부러진 정선의 길은 어찌 보면 20대와 닮았다. 88만원 세대는 구불거리며 자랐다. 모든 걸 미루는 유예의 삶이었다. 언제나 저 너머에 곧게 뻗은 길을 꿈꾸며 달려가지만, 모퉁이 뒤에는 어김없이 구부러진 길이 다시 시작됐다. 대학 가기 위해 학창시절을 작은 책상 위에서 구불거렸고, 막상 도착한 대학에서는 취업을 위해 청춘을 구부렸다.
구부러져 휘어 도는 정선의 강을 바라보며 가장 먼저 구불거린 삶을 떠올린다는 게 어쩐지 우습고 쓸쓸하다. 요새 젊은 것들이 힘이 없다고, 패기가 없다고 나무라는 소리를 듣기엔 마주한 현실이 너무나 견고하다.
88만원 세대를 공감하고 깊숙이 들여다본 장강명의 소설 <표백>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길 위에 펼쳐진 풍경 또한 참 완벽하고 시시하다. 이색적인 설경에 감탄하길 잠시. 이내 어딜 봐도 하얗기만 한 풍경이 견고하게 느껴진다. 이토록 하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그저 묵묵히 걷는 수밖에 없다.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지치지 않도록 함께 걷는다면 언젠가는 기어코 봄이 온다. 그리고 하얗게 쌓였던 눈은 천천히 녹아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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