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길 ㅣ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아름다운 우리 길 ㅣ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 글 사진 진우석 출판팀장
  • 승인 2013.01.3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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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계곡 정자와 누각을 엮어 만든 길
거연정∼동호정∼농월정…약 6km 2시간 30분

▲ 너럭바위가 일품인 차일암과 동호정.

경남 함양에는 걷기 좋은 길이 두 곳 있다. 하나는 함양상림이고 다른 하나는 덕유산 육십령에서 이어진 화림동계곡이다. 상림은 2천여 그루의 나무들이 빚어내는 조화가 일품이다. 화림동계곡의 거연정과 농월정 등은 영남 정자 문화의 보고다. 계곡을 따라 선비들이 지나쳤던 숲과 계곡, 정자의 자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길이 선비문화탐방로다.

최치원이 만든 유서 깊은 숲
함양상림은 함양태수를 지내던 최치원이 위천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한 인공림으로 천연기념물 제154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야산의 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한다. 상림 주차장에 내리면 앞쪽으로 안내판이 서 있다. 숲 산책로를 따라 물레방아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동선으로 거리는 약 2km, 넉넉하게 1시간 잡으면 된다. 숲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함화루가 보인다. 본래 함양읍성 남문인 망악루였으나 1932년 지금의 위치에 옮겨지었다. 망악루는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는 뜻이다.

함화루를 지나 숲길로 들어서면 투박한 석불이 나온다. 이은리 냇가에서 발견된 석불을 옮겨온 것이다. 산책하던 할머니들이 정성껏 절을 올린다. 석불 얼굴이 할머니와 비슷하다. 석불을 지나면 메인 산책로가 나오면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참나무와 개서어나무, 단풍나무 등이 어울려 멋진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 바닥에 낙엽이 가득하고 바람 타고 잎사귀들이 떨어져 내린다. 낙엽을 맞으며 그 길을 걷는 맛은 만추의 특별한 즐거움이다. 사각사각 소리 들으며 걷다보면 물레방아 앞에 닿는다. 여기서 주차장으로 천천히 돌아가면 된다.

▲ 동호정 앞에서 차일암으로 건너는 나무다리.

▲ 화림동계곡 걷기에 가장 먼저 만나는 거연정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물씬 풍긴다.

함양은 ‘좌안동 우함양’으로 불릴 만큼 일찍부터 묵향의 꽃이 핀 선비의 고장이다. 유서 깊은 향교와 서원, 누각, 정자 등이 곳곳에 있다. 함양향교와 안의향교가 있고, 서원으로는 남계(藍溪), 청계(靑溪), 송호(松湖)를 비롯해 10개가 남아있다. 누각과 정자는 허물어지고 파괴된 것까지 합쳐 <함양군지>에 소개된 것만 해도 150개가 넘는다. 그래서 함양은 영남 정자문화의 보고라 불린다.

우거진 숲, 물 맑고 호젓한 계곡 옆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있다. 정자는 사대부의 풍류와 은일의 쉼터이자, 시서를 논하는 경연장이었다. 화림동계곡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비단 같은 물결인 금천이 흘러내리면서 멋진 너럭바위와 함께 담과 소를 만들어내며 정자와 멋지게 어울려 팔담팔정으로 불렸다.

화림동계곡은 과거를 보기 위해 먼 길은 떠나는 영남 유생들이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길목이었다. 예로부터 과거길은 과거만큼이나 힘든 길이었다. 괴나리봇짐에 미투리(삼·노 등을 꼬아 만든 신) 두어 짝 들고 산 넘고 물 건너 하염없이 걸어야 했다. 영남 유생에게 남덕유산 육십령길은 큰 고비였다. 험한 고개를 넘기 전에 정자에 앉아 한잔 술로 목을 축이고, 시 한 수 읊다 보면 고단함은 어느새 스르르 풀렸으리라.

▲ 동호정 앞의 솔숲.

▲ 너럭바위들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화림동계곡.

과거 보기 위해 육십령 넘던 길
선비문화탐방로의 출발점은 거연정이다. 운치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면 너럭바위 위에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다. 거연정은 1640년경 전시서가 서산서원을 짓고 그 옆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세웠다. 화재와 서원철폐령으로 무너졌다가 1872년 전시서의 7대손인 전재학, 전민진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서원의 재목으로 재건립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규모로 내부에는 벽체(뒷벽)를 판재로 구성한 판방을 1칸 두고 있어 소박하기 그지없다. 마루에 앉아 귀 기울이면 계곡 물소리가 음악처럼 들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 람천정을 지나면 그윽한 솔숲이 펼쳐진다.
거연정을 나오면 길은 계곡 오른쪽 산비탈을 타고 이어진다. 걷기 좋은 나무 데크와 오솔길이 이어져 휘파람이 절로 난다. 울창한 소나무 사이에 팔각형 누각인 영귀정(詠歸亭)이 서 있다. 영귀정을 지나면 잠시 도로를 따르던 길이 다시 동호정 안내판을 따라 계곡길로 이어진다. 길 양옆으로 수양버들이 춤을 추고, 왼쪽 아래로는 화림동 계곡물이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굽이쳐 흐른다. 15분쯤 가면 시야가 열리면서 동호정이 눈에 들어온다. 정자 앞의 유백색 너럭바위인 차일암은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이고, 동호정 뒤로 황석산(1190m)의 웅장한 모습이 일품이다.

지금은 동호정 앞의 너럭바위를 통틀어 차일암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강 가운데에는 노래 부르는 장소(영가대), 악기를 연주하는 곳(금적암), 술을 마시며 즐기던 곳(차일암)으로 나누어 불렀다고 한다. 풍류를 즐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름이 섬세하게 나누어진 것이다. 징검다리 건너면 차일암에 선다. 여기서 잠시 발을 담그고 망중한에 빠져보는 것도 좋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옛 선비도 이 바위에서 발을 담그고 노독을 풀었으리라.

동호정에 오르면 정자 안에서 본 계곡의 풍치가 그윽하다. 동호정은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정자로 바위 모양새에 맞춰 정자를 지었는데 지탱하는 통나무는 선도 고르지 않고 길이도 제각각이다. 자연과 동화되고자 했던 선비들의 지혜가 오롯이 전해진다. 동호정의 역사는 의외로 오래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했다.

동호정에서 다시 차일암으로 나오면 계곡 옆으로 호젓한 솔숲이 펼쳐진다. 길은 그 사이로 이어지고 솔숲을 지나면 둑길이 나타난다. 추수가 지난 논이 평화롭고 앞으로 소박한 마을과 부드러운 산이 펼쳐진다. 둑길을 지나면 호성마을과 만난다. 곶감이 익어가는 조용하고 소박한 마을이다.

▲ 동호정에서 호성마을로 가는 겨울 들판.

▲ 호성마을 농가에 걸린 곶감.

▲ 화림동계곡의 최고 절경인 월연암. 이곳에 세워진 정자가 농월정인데, 지금은 불타 사라졌다.

화림동계곡 최고 절경 농월정
경모정과 람천정을 연달아 지나면 울창한 밤나무가 가득하다. 가을철에는 걷다가 떨어진 밤을 줍는 재미가 쏠쏠하다. 밤나무 숲은 그윽한 솔숲으로 바뀌고 계곡에서 물을 논밭에 대기 위한 수로를 따르면 도로를 만난다. 여기서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길은 도로 건너편으로 나 있다. 지나가는 차를 주의해 도로를 건너면 길은 옛 도로로 이어진다. 비록 도로지만 차가 다니지 않아 걷기 안성맞춤이다.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길은 다시 계곡을 따른다. 수려한 농월정 일대 계곡이 시작되는 곳으로 선비문화탐방로의 하이라이트다.

철도 침목을 깐 호젓한 오솔길을 걷다보면 계곡 옆의 수려한 암반이 어서 오라고 유혹한다. 유혹을 물리치면서 천천히 걷다보면 대망의 농월정 앞에 이른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대첩 시 장렬히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머물면서 시회를 열기도 하고 세월을 낚기도 했다는 곳이다.

농월(弄月)은 ‘한잔 술로 달을 희롱하다’라는 말이고 월연(月淵)은 ‘못에 비친 달’이다. 즉 ‘못에 비친 달을 정자에서 희롱한다’는 뜻이다. 참 풍류가 넘치는 이름이다. 음력 보름 둥근달을 보면서 농월정에 앉아 술 한잔 기울이는 정취는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는데, 아쉽게도 농월정은 불에 타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농월정 앞의 월연암은 약 1000평에 이르는 펑퍼짐한 바위덩어리다. 바위 곳곳에 움푹한 웅덩이가 여럿 있다. 옛 선비들이 바위에 난 웅덩이에 막걸리를 붓고 꽃잎이나 솔잎을 띄워 바가지로 퍼마시며 풍류를 즐겼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월연암에 앉아 어서 정자가 복원되기를 기원하며 걷기를 마무리한다.

▲ 함양상림은 가을에 떨어진 낙엽 밟으며 걷기 좋다.

▲ 선비문화탐방로는 계곡을 따라 데크가 설치되어 걷기 편하다.

▲ 거연정을 지나면 잠시 도로를 따르지만 차가 다니지 않아 좋다.

▲ 영귀정에서 동호정 가는 길의 호젓한 계곡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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