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ew’s Travel Note ㅣ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Andrew’s Travel Note ㅣ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 글 사진 앤드류 김 기자
  • 승인 2012.12.2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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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꿈을 꾸는 클레멘타인 고향

▲ 새크라멘토의 오래된 교사에선 1800년대 미국 여성복장을 한 선생님이 방문객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교실 내의 일부는 1800년도에 제작된 것이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작가 미상의 미국 서부 민요 클레멘타인은 번안을 거치며 국내에 들어와 어부와 불쌍한 어린 딸의 서정적 동요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원곡 클레멘타인의 배경은 컴컴한 광산이며 광부와 그의 어린 딸이 등장한다.

“협곡 아래 굴속에서 금광 찾던 광부는, 그의 딸 클레멘타인과 광산에서 살았다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흥미로운 점은 동요 클레멘타인의 원어 가사에서 광부를 지칭하는 말로 ‘포티나이너(forty-niner)’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49라는 숫자에 사람을 뜻하는 영어 접미사 -er이 붙어 만들어진 이 특이한 낱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야기는 약 1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8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인근의 강바닥에서 우연히 금이 발견된다. 금이 나온다는 소문은 당시의 열악한 통신설비에도 불과하고 삽시간에 미국 동부를 거쳐 유럽과 중국까지 전해졌다. 그 결과 세계 각지에서 약 10만 명의 인구가 일획천금을 노리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왔다.

▲ 새크라멘토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주청사 캐피탈 빌딩.
▲ 새크라멘토 중심가를 걷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골드러시 시대의 부유층 의복을 차려입고 있다.

이미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던 존 셔터와 그의 가족들은 골드러시 인파를 모아 1849년에 새크라멘토시를 수립하고 도시헌장을 만든다. 이듬해에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은 새크라멘토는 캘리포니아주의 첫 도시이자 주도로 지정된다. 즉 1849년은 캘리포니아주 설립의 시발점이 된 해이다. 동시에 숫자 49는 골드러시로 몰려든 광부들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당시 포티나이너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황금을 쫓아 사막과 산을 넘어 서부에 도달할 때까지 질병과 사고로 가족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광산의 열악한 환경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영양실조나 인디언의 습격 등으로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일을 마친 광부들은 살롱에서 술 한 잔 거치며 황금 대신 내던져진 암담한 생활에 자조적인 목소리로 클레멘타인 노래를 불렀다.

광부들의 손으로 황무지에 세워졌던 새크라멘토는 현재 캘리포니아주의 수도로서 아름다움과 위용을 지닌 도시로 성장했다. 인구 오십만의 작은 도시지만 새크라멘토의 시민들은 포티나이너 시대의 문화를 잘 보존하며 이름난 관광지로 만들었다. 도시의 역사가 짧은 새크라멘토는 조금만 오래된 건물이라면 앞에 명패를 걸어 시유적지로 보호한다. 명패에는 건립년도와 과거에 어떤 용도로 사용된 건물이었는지가 적혀 있다. 지역개발이나 건물 재건축 등의 풍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시다.

새크라멘토 강변에선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사용 중인 외륜 증기선을 현재도 볼 수 있다. 골드러시 시대를 그대로 재현한 도시의 구석구석에선 옛 복장의 남녀가 재미난 공연을 선보인다. 이 깜짝 공연에는 포티나이너 시대의 보안관과 카우보이, 광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새크라멘토에 살고 있는 자원봉사자다. 여성들은 당시의 복장을 하고 “남성들이여, 여성에게도 투표권 달라” 며 길거리 데모를 재현한다. 그러고 있자면 순찰을 돌던 보안관들이 이를 목격하고 쫓아가 여성들을 체포해 끌고 간다. 짧은 해프닝으로 구성된 길거리 공연이지만 도시 곳곳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 재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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